어쩌다 온 가족이 달리게 됐지?
경품은 골드바였다. 나는 아이들과 나란히 서서, 괜히 호들갑스럽게 서로의 배번호를 확인했다. 경품 추첨 시간은 언제나 기대와 설렘의 기운이 날아다닌다. 아주 짧은 순간. 그리고 그보다 더 짧게 아쉬움이 흩날린다. 잠깐 재미있고, 아무도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게 끝.
쌀, 포도, 라면 등의 조금 '가벼운' 경품은 마라톤이 진행되는 동안 추첨을 했나 보다. 달리기를 마치고 (완주메달과 간식을 받고, 잔치국수와 두부김치를 먹은 뒤) 사람들이 모인 곳에 고개를 디밀어보니, 당첨자 번호가 붙어 있었다. 혹시나 하고 찾았으나 역시 우리 가족들의 번호는 없었다. 없네, 하고 돌아서려는데 한 남자가 무리에서 빠져나오면서 한마디 했다.
"되는 게 이상한 거야."
나는 웃었다. 그렇지, 되는 게 이상한 거지. 안 되는 게 당연하고, 그래서 되면 너무너무 기쁜 거지. 나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섰다.
어제는 6시에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멸치새우주먹밥과 고구마 말랭이를 만들고 사과를 깎았다. 세 시간 후 온 가족이 달리기를 해야 하니까 잘 먹여야 한다고,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기념품으로 받은 기능성 티셔츠를 다같이 맞춰 입고 안성맞춤랜드로 가는 차 안에서 둘째가 말했다. "정말 마라톤 하는 거야? 으으, 실감이 안 나." 그러니까, 나도 마찬가지였다.
준비운동 시간엔, 아이들 쭈뼛거리지 말라고 열심히 율동을 따라 했더니 카메라가 다가왔다. 어랏. 끝나고 나니 말까지 건다. "어떠셨어요?" 에라, 모르겠다. "흥겨웠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내가, 셋째는 남편이 책임지기로 했다. 한 달 전 가족마라톤에 나가자고 했을 때, 8세 막내는 좋다고 방방 뛰었다. 그날 밤부터 빨리 11월 10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첫 연습 이후로 힘들다며 퍼지곤 했다. 남편은 셋째를 업고 뛸 각오를 했다.
13세 첫째는 긴장했는지, 30분 사이 화장실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준비운동을 할 때도 어딘가 멍했다. 그러더니 5킬로미터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둘째가 배가 아파 두어 번 걷는 동안, 아예 앞서 갔다. 마지막 1킬로미터를 남겨두고 먼저 가서 사진 찍기 위해 달려나가는 길에 첫째를 만났다. "이야. 대단하다. 어떻게 된 거야?" 달아오른 볼에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첫째가 대답했다. "오기로 뛰는 거야, 오킬로."
11세 둘째는 서너 번쯤 걷고 완주했다. 처음엔 가족마라톤에 절대 안 나간다고 강경하게 버텼고, 중간엔 제일 열심히 연습했으며, 그래놓고도 시작 직전까지 완주하지 못하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했던 아이는 제한 시간을 넉넉히 남기고 들어왔다. 오늘 학교에서 주말에 한 일로 '가족마라톤'을 발표했다면서, 다음엔 10킬로미터를 도전해봐야겠다고 말했다.
피니시라인 바로 앞에서 첫째와 둘째를 맞이한 후, 셋째와 남편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핸드폰 카메라를 켜놓고 (결승선 대문에 붙은) 초단위로 넘어가는 디지털 시계를 보면서, 조금 두근거렸다. 제한 시간인 한 시간 안에 못 들어오려나, 다치진 않았겠지, 아이를 업고 오다 남편이 너무 힘들어져버렸을까, 걱정도 됐다.
52분이 지나서 아이가 보였다. 마구 뛰어오고 있었다. 나를 보자 활짝 웃으며 만세 자세로 결승선 통과! (내 마음속 금메달!!) 그리고 이어서 동영상을 찍으며 남편이 들어왔다. 우리는 얼싸안고 아주 난리였다.
사우나에서 한참 목욕을 하고, 찜질방에서 서로의 배를 베고 누워 잠도 자고, 책도 읽고, 머리도 땋아주었다. 푸드코트에서 허기를 채우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돌아왔다.
(셋째는 완주메달을 목에 건 채로) 남은 하루를 보내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가만히 오늘 하루를 떠올려보았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하루였다. 상상해본 적도 없는 하루.
달리기를 시작한 게 지난 5월. 나만의 프로젝트로 삼고 6개월은 달리겠다고 했을 때, 사실은 나도 끝까지, 그러니까 약속한 만큼 달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달리기에 재미를 느끼고, 나아가 불이 붙어 막 달려나가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달리는 그림까지는 감히 그리지 못했다. 그러면 좋겠다고, 아주 살짝, 스치듯 바란 적은 있는 것도 같지만.
남편과 함께 시작했지만, 얼떨결에 따라온 줄로만 알았고, 그래서 결국은 나만의 일이 될 거라 생각했다. 같이 마라톤대회에 나가고, 계속 비슷한 속도로 성장하며 때때로 같이 달리러 나가는 것만 해도, 아무나 누리지 못할 복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쩌다 온 가족이 달리게 됐지? 오늘이 첫 마라톤이지만, 이제 시작이지만,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거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너무 좋다고, 참 잘됐다고 말하기엔, 제대로 기대한 적조차 없는 일이라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러니까, '되는 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냥, 행운처럼 놀라워하기로 한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기뻐하기로 한다.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감사하기로 한다. 이만큼 살면서 배운 대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해나가고, 그 이상은 욕심내지 않기로 한다.
요약
가족들과 함께 달릴 수도 있다. 어떤 이벤트보다 특별하고 재미있는데, 내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