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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Nov 18. 2024

29주. 새삼 불뚝 솟은 점들

좀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항상 달리는데도 왜 달릴 때마다 힘이 드는 걸까. 하프코스를 완주한 뒤로 훈련을 대하는 기분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그건 기분뿐이었다. 실제로 달리는 건 달라진 점이 없었다. 익숙해지면 쉬워질 줄 알았다. 참고 달리면 쉬워지는 날이 올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믿음에 익숙해질 뿐 그 일이 쉬워지는 건 아니었다. 쉽게 달려지는 날은 오지도 않을 것이고 애당초 그런 건 있지도 않을 것이었다. 실망스러웠다. 삶에 보기 좋게 속은 기분이었다. 결국 알게 된 건 결코 쉬워지는 일은 없으며 익숙해질 뿐이라는 것. 그걸 알고도 계속 달릴 수밖에 없는 게 삶이라는 것뿐. 맙소사. 그것이었다.

ㅡ이채원, <나의 아름다운 마라톤>



기세 좋게 준비운동을 하고 달린다. 당황스럽게, 시작부터 힘들다. 나는 의아하다. 왜지? 지난번에 한 시간이나 가뿐하게 달린 것 같은데. 20킬로미터도 뛴 나인데. 아무래도 오늘은 3킬로미터도 못 뛰겠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이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러기엔 무색하니까 30분만 버티자고 나를 달랜다.


나는 아직 이것밖에 안 되는가, 혹은 내 몸은 이제 이렇게 되어버린 건가, 은근히 실망스러워하다 보면 어느새 3킬로를 지난다. 참 오래도 실망했다, 그런 일로 실망을 하고 그러냐, 아직도 스스로를 모르는 건가, 이제 받아들여라, 그런 대화를 혼자서 허물없이 나누다 보면 30분, 그러니까 5킬로미터쯤 가있다.


이왕 이리된 김에... 어영부영하다 보면 왜인지 갑자기 달릴 만해진다(혹시 이게 바로 '러너스 하이'?!). 아싸, 하면서 좀 더 달린다. 그렇게 달리기를 마치면, 가뿐하게 달린 것만 같다. 숨을 몰아쉬고 땀을 닦으면서 뿌듯하고 상쾌해져서는, 힘들긴 했지만 내내 힘차게 달렸다고 기억한다. 확실히 더 건강해졌으니, 이다음에 달릴 때에는 더 잘 달리겠지 희망마저 샘솟는다.





가끔 넷째가 생기는 꿈을 꾼다. 그 꿈속의 나는 말문이 막히고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고 주저앉아 멍하다. 깨고 나서는, 나에게 악몽이 넷째라는 게 기막히고 우스워 죽는다. 물론 놀란 토끼눈으로 현실 분간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린 다음에.


그래도, 첫 출산의 충격적인 고통을 까먹고 둘째를 갖고, 육아의 처절함이 흐려져 셋째를 낳은 일을 두고는, 얼마나 다행이냐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제는 미사 후 대모님의 여섯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넷째의 가능성을 없애버린 조치가 잠깐 아쉬웠다. (순간 정신줄을 놓은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인생의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그 점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만 연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점들은 필연적이고 결정적으로 불뚝 솟아 있어서, 지난날을 돌아보기만 하면 언제나 또렷이 보이는 건 아닌 것 같다.


뇌과학이 밝혀냈고 경험으로 우리가 알듯이, 인간은 우울할 때 우울한 기억 속에서 허우적대고, 실수를 저지르고 자책할 때엔 평생 실수만 하고 살아온 것 같다. 부모나 배우자가 서운하게 하면 지금까지 그들이 자기를 서운하게 했던 기억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는 나를 있게 한, 내 인생의 이야기에 대한 '점'들에 관해, 지난 과거를 훑어보며 때마다 편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점을 택해 어떤 선을 그을지는 현재, 혹은 현재에 대한 나의 판단과 기분에 따라 꽤나 달라진다. 마치 나의 세 아이들을 두고 아마도 어느 때에는 '어쩌자고... 바보같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눈앞의 세 아이들을 보며 착각이든 망각이든 희망이든 뭐든 붙잡고 어떤 시절을 건너와서 감사하기만 한 것처럼.





달리기 초반에 당황하고 실망하고 좌절스럽더라도, 마침내는 꼭 이긴 것 같고 뭔가 이룬 것 같다. 그런 기억을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아가는 동안, 나는 내 삶에서 어떤 점들을 새삼 발견했다.


나는 결과가 보장되지 않아도 마음이 움직이는 일에 몸을 일으키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고, 한계에 부딪혀 온통 멍이 들어도 견디는 힘이 있었으며,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합당한 열매를 손에 쥐고 명랑하고 호방하게 지냈다. 확실히 그랬다. 불뚝 솟아 있는 점들이 지금 여기까지 이어져 있다.


나는 그런 기억들로 좀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 더 힘을 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쉬워지지 않아도 괜찮다. 속은 것 같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기억력이 갈수록 안 좋아져서 그조차도 잊는다.




요약

달리는 데 익숙해져도 달리기는 힘들다. 그래도 달리기를 마치고 나면, 해냈다는 기억으로 남는다.


되살아난 점들. 앞으로도 이어나가기로 한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까먹고, 좋은 날씨와 예쁜 경치와 힘찼던 순간으로.


놀랍게 따스했던 11월의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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