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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Nov 25. 2024

30주. 어떤 부류의 사람들 (하프마라톤/서울)

알 수 없고, 설명 불가능하고, 예상치 못한 전개.

세상은 이렇게 뭐든 두 부류로 간단하게 나뉠 수 있다. 그 점이 이상하면서도 통쾌하다.  

ㅡ이채원, <나의 아름다운 마라톤>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는 개안이라도 한 것처럼,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한 달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세상엔 딱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하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을 이렇게 가르는 증상이 어찌나 심했는지, 스스로 정신 차리자고 해야 할 정도였다(어떤 기준으로든 사람을 나누는 렌즈를 장착하는 것은 꺼림칙하니까. 남자/여자, 기독교인/비기독교인, 1번 지지자/2번 지지자, 자식이 있는 사람/없는 사람 등, 꽤나 많은 것을 알려주고 확실히 편한 구분법이, 형편없이 틀리고 무용하다 못해 유해한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 하지만 어떠한 의도도, 의지도 없이 자동적으로 구분이 됐다. 뱃살과 허리 라인, 허벅지와 종아리의 모양, 어깨와 등의 굽은 정도, 앉은 자세와 선 자세, 걸음걸이, 심지어 얼굴빛과 눈빛으로, 아니 어쩌면 그가 내뿜는 기운으로 나는 알 것만 같았다. 저 사람은 평소 운동을 하고 있어, 생기와 활력, 자신감이 느껴져, 하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였다. 생기, 활력과 함께 안정된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하나같이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육체의 모양은 오히려 너무 단순한, 표면적이고 부수적인 지표였다.


(이 또한 안팎으로 반례가 기웃거리는 착각의 렌즈겠지만, 그때) 나는 일종의 깨우침처럼 다가온 이 사실에 제대로 꽂혔다.


갈수록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은지가 무섭도록 또렷해졌다. 돌아보면 바로 그런 마음이 나를 '열심히' 달리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러 모로 정직한 달리기는 내 마음이 허황되지도 않게, 허상인가 의심하지도 않게 했다.


너무 욕심을 내면 아직(혹은 더 이상) 너의 몸 상태가 이만큼은 감당할 수 없다고 얄짤없이 알려주었고, 효과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따져볼 필요가 없게, 그럴 겨를조차 주지 않고 확실히, 그리고 꾸준히 느끼게 해주었다.





7개월 전에 달리기+글쓰기 30주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설렜고 기대도 됐다. 걱정은 별로 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만 달린다고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덥거나 비가 오거나 아니면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한 번도 못 달린 주에는 그게 또 글의 소재가 되겠지, 그런 얍삽한 생각을 했더랬다. 그리고 어쨌든 운동, 그것도 달리기라는 '격한' 운동을 십여 년 만에 하는데 변화야 당연히 있겠지! 확신했다.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기대를 했었던가. 음, 다이어트가 목표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다이어트가 마땅히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틀렸다. 1-2킬로그램 정도만 빠졌는데, 달리기를 시작할 즈음 마른 비만(체중은 정상 범위에 있으나, 체지방이 많은)에 가까웠던 나에게는 알맞은 결과인 것도 같다. 아무튼 나는 정말 잘 먹게 되었는데(식욕도 좋아지고, 식단이 건강해졌다), 나는 몸무게야 어떻든, 맛있는 것을 맛있게 먹는 이 생활이 정말이지 참 좋다.


체중 변화는 미미했는데, 체지방/근육량의 변화 혹은 자세의 변화 때문인지 몸의 라인의 변화는 미묘하게 확연했다. 셋째 모유수유를 마친 후 차곡차곡 살이 붙으면서 몸을 가리는 옷을 입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고, 그런 옷들이 갑자기 지겨워졌다.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입을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매일 달리기를 하고 싶었는데, 셋 다 조금씩 미완이다. 일단 '매일' 달리는 것은 내 몸 상태나 일상에 무리가 되어서,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서너 번 달렸다. 날마다의 루틴으로 매일 달리는 것이 최적화되는 날이 올까? 나도 궁금하다.


대신 일주일 두 번 요가와 틈틈이 근력운동을 했는데, 나로서는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달리기에 근력이 이토록이나 중요한 줄 몰랐고, 요가가 달리기에 훌륭한 보강운동이 된다는 것도 몰랐다. 그것을 알아가면서 띄엄띄엄 쉬엄쉬엄 하던 요가에 불이 붙었다. 아마 요가도 평생 할 것 같다. 근력 운동은 무릎 부상으로 어쩔 수 없이 시작했는데, 달리기만큼이나 어제와 다른 오늘을 체험하게 해주고, 짧고 굵게 마칠 수 있어서 푹 빠지고 있다(고 하기엔 너무 소량의 홈트). 스쿼트, 플랭크, 모디파이드 푸시업 등을 하다 보면, 혼자서도 깜짝깜짝 놀란다. (내가 어쩌다 이런 짓을...?)


처음부터 가장 명확한 목표였던 '잠'은 원했던 만큼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운동 후 낮잠을 자게 되는 날도 많았고(수면 장애자로서, 나는 잠이 오면 가능한 무조건 잔다), 월요일마다 달리기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오히려 잠을 방해하기도 했다. (역시 수면 장애자로서) 운동을 하기 위해 알람에 맞춰 깨는 일도 웬만하면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더 많이 잤고, 한밤에 깨어 있는 일이 적었고, 낮잠이든 밤잠이든 수면의 질이 좋아진 건 분명하다.


몸, 스타일, 식단, 잠 그보다 가장 확실히, 크게 달라진 것은 정신건강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여유롭고 활기찬 일상, 편안하고 유쾌해진 관계다. 이건 그냥 순간순간 내가 느낀다. 이렇게만 살면 좋겠다, 하는 그 정도랄까. 그제인가는 첫째가 "엄마, 요즘에 웃음이 많아졌네."라고 했는데, 그렇다. 웃는 일도 많아졌다.





내가 글을 쓰기 위해 달리는 사람인지, 달리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사실 그 둘은 서로 나눌 수는 없다. 달리지 않는다면 글을 쓰지도 않을 것이며 글을 쓰지 않는다면 계속 달릴 것인지에 대해 확신이 들지 않는다. 달리기와 글쓰기는 나를 드러내는 두 가지 방법이다. 내 정신과 육체를 나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ㅡ조지 쉬언, <달리기와 존재하기>


확실히 나는 이 사람만큼 달리기에 미치진 않았다. 하지만 지난 7개월 동안, 글을 쓰기 위해 달리는 건지 달리기 위해 글을 쓰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긴 했다. 이 브런치북이 끝나면 달리기를 좀 슬렁슬렁하게 될까? 마음이 식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아니길 바란다.


지난 토요일, 여의도밤섬마라톤대회에 참가해 하프코스를 완주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생각지도 않았던 일인데, 10킬로미터 마라톤을 두어 번 완주하고 괜히 마음이 가라앉아서, 그럼에도 더 타오르고 싶어서, 덜컥 신청부터 했던 것이다.


두 시간 남짓 달리면서, '참... 이게 뭐야. 딱히 이유도 없이 앞만 보고 두 시간을 내내 달리고 있다니. 그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또 대체 뭐야.'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러니까 사실, 이런저런 과학적 증거들을 보고 삶이 달라졌다는 간증을 들어도, 달리는 순간조차도 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설명이 불가능했다. 대체 나는, 아니 다들,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어쨌건 세상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끝까지 그 부류의 사람이고 싶다. 또다시 마음이 가라앉고 갈피를 못 잡는 날엔, 그땐 풀코스 마라톤이 내 앞에 있겠지.




요약

달리는 사람이 되고 나서 짧은 기간 동안 나는 많이 변했다. 몸, 스타일, 식단, 그리고 정신건강 등. 덕분에 일상과 관계까지 달라졌다.

계속 달리는 사람이고 싶다. 이런저런 고비가 있겠지만, 다음 목표를 잡고. 달리기엔 모험할 것도 도전할 것도 무궁무진하니 낙관적으로 기대해본다. 게다가 얼마간 ‘퇴행’해도 얼마든지 괜찮은 종목이기까지 하다.


이제 가판대 앞에서 사진 찍으려고 줄 서지 않는다. 경품 추첨 중인 사회자가 보이는 무대가 얼추 보이게 찰칵.


내내 5도 이하였는데, 해가 좋아서인가, 그리 춥지 않았다.


코스도 좋았다. 첫 마라톤대회였던 815런에서 달렸던 주로와 겹친다. 그땐 덥고 좁고 지루해서 좋지 않다고 느꼈는데, 그런 기억을 곱씹으며.


아직 5일이나 남았는데 11월을 마무리하는 글을 쓰려니 아쉽지만.



11월의 달리기 총정리

산 것: 닭가슴살, 긴바지. (마스크와 장갑, 모자를 곧 살 예정)

부상: 없음.

몸의 변화: 몸무게가 도로 늘었다... (잘 먹은 탓. 그런데 체중계에 잘 안 올라간다. 이 부분은 체념하기로...)

일상의 변화: 감정의 폭발이 거의 없다. 잘 챙겨 먹고 있다. 혼자 먹는 점심식사에 요리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원래도 자연 식단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오직 나만을 위해 성실하게 버섯, 두부, 닭가슴살, 계란, 샐러드 등을 먹는 일상은 처음. (그래야 한다,는 생각보다 먹고 싶다,는 마음으로)

읽은 책: <나의 아름다운 마라톤>(달리기를 아예 안 하던 사람이 풀코스 마라톤을 뛰기까지의 이야기를 무려 장편소설로 썼다.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설정만 빼면 현실적인 정보와 공감되는 경험이 한가득이다. 소설적인 재미도 있다), <달리기와 존재하기>('달리기'가 붙은 책은 모조리 빌렸는데, 처음 몇 장을 읽고 바로 구매했다. 조금씩, 줄 치며 읽어야 할 책), <달리기가 나에게 알려준 것들>(중고서점에서 '달리기'가 붙은 책이길래 구매. 젊지도 건강하지도 체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달알못 여성이 4년 만에 250km 고비사막마라톤을 완주하는 사람이 되었다. 공감 지점도, 배울 것도 많은 이야기)

총평: 크고 작게 화내는 일, 서글퍼지거나 서운해하는 일, 우울하거나 무기력해지는 일, 조급해지거나 불안해하는 일이 정말... 엄청나게 줄었다. 나라는 사람이 여유롭고 너그럽고 잔잔하게 느껴진다(충격!). 그러면서 실제적인 일들을 적당히 야무지게 해나가고 있다. 이 편안함과 평화, 그리고 만족스러움과 감사함은 달리기가 켠 스위치에서 비롯됐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김성윤 교수는 '몸은 말 안 듣는 강아지'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면 이 몸을 훈련시키고 달래가며 평생 달리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요즘 그런 생각이 한창이다.



+) 참고가 되었던 영상


겨울철 달리기 복장. 구체적이고 총체적이다.

https://youtu.be/9swclEWl3vA?si=R4nb8X-mR7X0fXja


러너의 식단. 요즘 틀면 나오는 정희원 교수의 사뭇 다른 표정과 이야기. 신선했다.

https://youtu.be/mMuRgaV9wOM?si=5BbkxavxznBMUPe


달리기와 뇌.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무지 많은데, 화자의 경력(달리기뿐 아니라 마라톤 완주를 오래, 많이 한 뇌질환 재활의학 전문의)과 전달력 덕분에 귀에 쏙쏙.

https://youtu.be/fU2cp-0vKWU?si=Q8389bOFMiZTSnAt



*<주간 달려요정>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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