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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Nov 24. 2023

첫째가 나에게 오다, 멈칫

둘째는 사과 같고, 첫째는 수박 같았다.

육아 집중기엔 환희와 감사, 경이와 한계를 느끼고 또 느낀다. 인간이 느낄 만한 것 중 강력하기로는 손에 꼽을 텐데, 그런 마음들이 하루하루 널린다. 가만 생각하면 그런 면에서 육아는, 스펙터클하고 다이내믹한 면이 있다. '경력'과 '자아'와 '영혼'을 갉아먹힐 만하다.


그렇게 송곳처럼 뾰족뾰족한 감정들이 과다하면 웬만해선 무뎌지고 멍해지는데, 유난히, 여전히 가슴 아린 순간이 있다.





둘째를 향한 주된 정서가 '미안함'인 것은, 둘째를 배고도, 둘째를 낳고도 한참 동안 둘째보다 첫째를 가슴에 품고 있어서다.

모든 게 첫째 때와는 달랐다. 임신 내내 임산부인 나나 태아인 둘째가 아니라, 첫째가 우선순위였다. 둘째는 태명을 지어놓고도 부른 적이 없다. 지칭이었지, 호칭이 아니었다. 산후조리원에 갈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도,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엄마'와 떨어져 있어야 할 '아기'인 첫째(30개월)가 너무나 애달파서다.


(첫째도 출입할 수 있는 곳으로) 결국 가기로 결정하고, 머리 묶어줄 사람이 없어서(시어머니가 봐주시기로 했는데, 아들만 키워봐서 여자아이 머리 못 묶을 것 같다고 하셨다) 아이 머리를 단발로 잘라줄 때에도 한없이 애처로웠다. 산부인과에서 2박3일, 산후조리원에서 2주를 못 보는 동안... 이 아이가 얼마나 놀랄까, 얼마나 나를 찾을까, 얼마나 불안할까... 그런 생각들로 꽉 차 있었다.


둘째는 예정일보다 열흘 먼저 나왔다. 다행히 이슬이 제대로 보여서 여행 중인 시어머니를 긴급 호출, 늦지 않게 오셨다. 출산가방을 싸두고 외출 준비를 마친 뒤, 진통 간격을 재면서 기다렸다. 세탁기 돌리는 방법이나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 같은 걸 써둔 종이를 붙여두고, 남편과 시어머니께 당부의 말을 하고 또 하고... 그런 중에도 내 눈엔 첫째만 들어왔다. 출산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고 뭐고, 이 묘한 분위기를 아는 것 같은 첫째를 애달프게 바라보면서. 책을 읽어주고, 그림 그리는 아이 옆에 바짝 붙어 머리를 쓰다듬다가, 심상하지 않은 척 자꾸 물었다.



OO야, 엄마가 사랑하는 거 알지?



그럼 아이는 또 묘하게 이상한 걸 눈치라도 챈 것처럼,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정말이야.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무슨 일이 있어도.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알았던 것처럼.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는데, 파악! 양수가 터졌다. 놀라서(그런 일은 처음이라..) 후덜거리며 하의를 갈아입고 남편과 나가면서도, 첫째가 눈에 밟혔다.





둘째에 대한 출산의 기억은, '수월했다'는 것이다. 첫 출산에 정말 '죽는 것' 같았기 때문에, 막상 병원에 도착하자 비로소 너무나 떨렸는데, 첫 내진에 이미 자궁이 많이 열려 있었고(그래서 무통주사 못 맞는다고..ㅜㅜ 첫째 때는 한밤이어서 마취의사가 없어서 못 맞았는데), 아기가 머리도 작고 몸도 작아서인지, 첫째 때만 생각한 나는 "네? 나왔다고요?" 할 만큼 이제 시작한 것 같은데 끝이 났다. (하지만 기저효과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예상한 고통이 너무나 거대했던 탓이었다고.)


둘째 날, 시어머니가 첫째를 데리고 오기로 했다. 첫째에게 주려고 챙겨둔 간식을 보는데 내가 긴장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첫째가 나타났다. 내게 마구 달려들 줄 알았는데, 문 앞에 서서 웃기만 했다. 이런저런 엉뚱한 말을 하면서.



OO야, 이리 와.



그런 말을 할 때부터 벌써 눈물이 맺혔다.


내게 안긴 둘째를 살피는 첫째. 그 모습을 보는데 마음 안에서 무언가 무너지고 있었다.


둘째는 사과 같고, 첫째는 수박 같았다.

나의 아기가... 이제 더 이상 아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이제 귀엽지가 않았다.


어떤 시절이, 너에게도 나에게도 지나버린 것을, 나는 아프게 바라봤다. 첫째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한 마음이었는지, 공감 혹은 감정이입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살면서 이런 식으로 잃어갔던 상실감을 한꺼번에 기억해버린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럼에도... 함께 알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네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게 약속해도, 달라질 상황을.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둘째를 맡기고 병원 앞 정원으로 첫째와 나갔다. 둘만의 시간. 이제 이런 '둘만의 시간'은 아주 특별한 것이 될 것이었다. 마구 즐거워하지 않는, 대책 없이 굴지 않는 첫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내 무릎에 앉혀놓고 가만히 바라보는데, 주책맞게 눈물이 자꾸만 솟아나왔다.





첫째는 아침에 자고 나오면, 나에게 다가왔었다. 한참을 품에 안겨 있었다.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울다 깨던 아기가, 잠에서 깼을 때 내가 없으면 급하게 찾던 아기가, 어느덧 크기도 하고 마음도 편안해져서, 겨우 찾은 아이의, 우리의 안정적인 첫 일과였다.


둘째는 해가 질 때 자고, 해가 뜨면 깨는 새나라의 어린이, 그리고 밤에 (모유수유만 하는데도) 한두 번 깨는 순둥한 아기였다. 아침에 첫째가 깰 때면, 이미 내 품엔 둘째가 있었다.


첫째가 깨서 방에서 나오면,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나는 화알짝 웃었다. 잠이 덜 깬 얼굴로 내게로 오다가, 첫째가 멈칫, 했다. 내 품에서 젖을 먹고 있는 둘째를 보고 다가오지 못했다.


그 얼굴을, 무언가 이해해보려고 하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이리 와." 말하고 옆에 앉은 첫째를 남은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했던 다짐을, 그 순간의 마음을 나는 거의 지키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때 그 마음이, 다른 모든 것들과 달리, 흐릿해지지 않고 여전히, 아리다.



우리 이렇게 서로 눈에 담던 순간이 엄마를 살게 한 것 같아. 그리고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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