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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Nov 18. 2023

좋아, 오늘부터 우리도 낮에 영화를 보는 거야!

지속가능하게 함께 살려면 이 방향으로

아무리 돌아보아도, 인생에 아기가 들어오고 나서 생긴 변화는 삶을 뒤흔드는 수준이었다.

사람이란 존재가 언제 또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룸메이트가 생기는 정도로도 일상과 습관에 조정이 필요한데, 말도 안 통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내 몸에서 나를 수신자로 나왔으니, 100퍼센트 가깝게 양보와 배려와 희생을 하게 된다.

먹고 자고 씻고 입고 싸는, 살아가는 데 기본, 아니 필수 요소도 아기에 맞추고, 시간과 공간, 돈과 에너지도 아기에게 내어준다.


시간과 공간, 돈과 에너지 모두 한계가 있고, 내 몸도 내 마음도 하나이기 때문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우선순위가 재배열된다. 물건도, 습관도, 취미도, 스타일도 버린다.

그러한 과정을 겪는 게 인간으로서 나쁘진 않다고 보지만... 휘몰아치듯 나와 내 삶을 흔들 땐 중얼대게 마련이다. 혼란하다, 혼란해..





그러다 '아기'가 '자식'이 되어가면, 나도 '엄마이기만 한 나'에서 '엄마 역할도 하는 나'가 된다. 아기 쪽으로 심하게 기울었던 삶의 추를 내 쪽으로 다시 조정하는 과정을 밟아야 하는 때가 오는 것이다.


그것은 이전의 변화와는 달리 갑작스럽지 않다. ('문득' 깨닫고 갑작스럽게 느끼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는 내가 애를 쓰고 선을 긋고 여기까지라고, 이제부터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나중에 '좀 일렀나', '더 기다릴 걸 그랬나', '아냐, 진작 했어야 했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고.


그중에 확실히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첫 아이가 나왔을 때 우리 집 구조는 이랬다. 안방 겸 거실, 창고로 쓸 만한 작은 방, 주방 겸 통로, 화장실.

신혼일 때는 부족함 없는 스윗홈이었다.


아기가 나왔다. 예민하고, 잠투정 심하고, 많이 우는.

안방 침대에 아기를 재우면,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안방과 주방을 가르는 여닫이 문은 불빛도 소리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운 좋게 우리에게 시간과 에너지가 남아서) 무언가 하려면 우리는 창고 같은 작은방에 숨어들어야 했다. 음모를 꾸미는 것 같아 키득키득 웃기도 했지만, 사실 우리 처지가 처량해서 우습기도 했다.


그때, 우리보다 몇 개월 먼저 아기를 낳은 지인이 있었는데, 아기를 재워놓고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갸우뚱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패드도 에어팟도 없(다고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공간이나 소리에 대해서도 그랬지만, 아이를 재우고 나서 두 시간이라는 여분의 통 시간이 났다는 게 놀라웠다. 첫째는 재우고 나서도 20-30분 간격으로 자꾸 깼다. 다시 재우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고, 서너 번 반복하면 따로 뭘 하겠다는 의지는 꺾이고 쪼개져 있었다. (산산이 부서진 계획이여..)   


그렇게 우리 삶에 '여가'라는 게 사라져갔다.





아이가 셋이 되었다. 그사이 우리는 육아의 영역에서 요령도 생겼고, 포기한 것도 많아졌다.

무엇보다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자기만의 시간, 자기만의 취미'를 어떻게든 시도하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몰폰' 하는 모양새였다. 아이들이 자는 밤에, 어쩌다 한 사람이 세 아이를 책임지는 날에. 잠을 포기하거나 상대에게 미안하거나, 내 욕망을 지치도록 유예하거나 내 시간을 얻기 위해 자꾸 뭔가를 만회해야 했다.

그렇게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의, 빚이 쌓여가는 일상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책에서 읽었나, 누구에게 들었나, 아니면 마음속에서 들린 소리였나, 남편이었던가, 나였던가 외쳤다.




애들이 있을 때 해야 한대!
엄마, 아빠도 자기를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여야 한대.




오호라. 그렇지. 엄마아빠도 사람인데.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게 따로 있잖아! 그걸 아이들에게 숨길 일은 아니잖아.

이 당연한 생각이, 아이들을 위해 어른인 우리가 사랑의 마음으로 했던 양보에 대해 한번 얘기 좀 해보자고 고개를 들었다. 당당하게.


우리는 그럴 때가 됐다고, 그래 보자고 했다.

일요일 오후, 늘 아이들에게 맞춰 틀었던 티비에, 우리의 영화를 틀었다. <마션>. (맷 데이먼이 감자 키우기에 성공하고 환호했을 때 나도 그런 기분..)


"지금부터 엄마아빠 영화 시간이야." 비장한 우리의 말에, 아이들은 그냥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정신 사납고(“저기… 안 보이는데 비켜주겠니?“ ”여기서 왔다갔다 하지 말고…”) 시끄러워서 ("조용해라... 좀..." “저 쪽에서 놀라고…”) 제대로 감상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날, 매우 들뜨고 행복했던 기억은 또렷하다.





이후로 서서히, 더 많은 것들을 했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엄마 일하니까 말 걸지 마"), 유튜브 강사를 따라 요가를 하고("엄마, 뭐하는 거야? 나도 같이 해도 돼?"), <해리포터>를 원서로 읽으며("아빠는 왜 아직도 1권이야?"), 아이들이 영화 볼 동안 따로 다른 방에서 우리의 영화를 보고(“엄마랑 아빠랑 데이트 해?”), 아이들끼리 놀라고 하고 차 마시러 다녀온다(“엄마아빠 진짜 데이트 하고 올게~“).

둘 중 하나가 하루 종일 외출하기도, 며칠씩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엄마아빠도 친구가 있고, 모임이 있거든.




이제야 정말 사는 것 같다. 무엇보다 '나'로 사는 것 같다.




아이들의 기억은 신속하게 리뉴얼 된다. "엄마아빠는 우리랑 놀아준 적이 없다"는 망언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잘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어이없고 손해 본 느낌도 없지 않아 있지만, 어쨌거나 지속가능하게 함께 살려면 이 방향이 맞지 싶다.



화면이 초라하구만. ㅋㅋ 그래도 우리의 도약은 황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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