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지하철 역 있으세요?

by 씀씀


아는 동생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겨 고민이란다. 맘에 드니 자꾸 긴장돼 어렵지 않을 대화까지 어렵다고. 근데 설상가상, 그분 꿈꾸는 이성상은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라는데 어쩌냐는 거다. 그럼 나는 어쩔까.


말이 나와 말인데, 대화 잘 통하는 사람. 나도 참 좋아한다. 허나 적어도 소개팅에서 원하는 스타일을 말할 때만큼은 참아줘야 하는 답변이라 생각한다. 아니 안 그래도 어색해서, 옹알이를 다시 시작할 것만 같은데 그 말 들으면 어디 대화가 되겠냐고.


통하는 게 명백한 바늘이랑 실도, 몇 번 침 바르며 씨름해야 통하는 마당에. 고체인 바늘이랑 실도 그리 고전하는 판국에, 생물체인 사람이 어떻게 여기서 야 한 번 했다고 저기서 바로 호 하면서 순식간에, 쉽게 통할까.


그래도 언니가 돼서 뭐라도 말해주긴 해야하니, 두 가지를 일러줬다. 1. 누구나 할 것 같은 답 밖에 못 할 것 같으면 그걸 누구도 안 했을 표현으로 하라. 2. n번째 소개팅녀로 만족할 게 아니면 질문 매뉴얼 리셋하고 한 번도 안 받아봤을 질문을 하라.


동생은 감히 예를 들어달란다.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함부로 거두는 게 아닌데… 일단 너는 나랑은 대화가 안 통하는 걸로 결론 난 줄은 알고 들어라.


지금부터 주목. 첫 만남이나 애프터에서의 질문과 답은 객관식도 주관식도 아닌, 자유롭게 서술하시오.


무슨 음식 좋아하냐고 상대가 묻는다. 너는 딱 떨어지는 대답만 딱 재미없게 하겠지. 그래버리면, 네가 말한 음식과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이 똑같은 게 아닌 이상 어떻게 어디에서 대화가 통할까. 네가 한 대답에 여분의 꺼리가 없는데. 그러니 너의 털털한 식성에 대한 정보를 주고 어필도 하되, 상대에 대한 호감도 얹자. 그럼 상대가 네 대답에서 취향 에 따라 대화를 이어가겠지.


"다 잘 먹어요. 이쯤 되면 좀 가리는 게 맞지 않나 싶게 잡식성인데, 오늘 처음 알았어요. 제가 초밥을 이렇게나 좋아하는지. 이거 너무 맛있는데요?"


저기까진 자신 없다. 대답은 내 능력 밖이다 생각되면 그럴 땐 선공이다. 우리에겐 질문이 있다. 대신 조건도 있다. 누구도 안 물어봤을 것 같은 질문을 할 것. 만약 이것도 못 하겠다. 그럼 평범한 질문을 평범하지 않게 해라. 대답이 약하니 질문으로라도 각인돼야지. 나한테 이걸 물어본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클래식이 괜히 영원한 게 아니다.


보통 퇴근하고 뭐 하세요? 이 식상하고 지루하다 못해 상대 답변까지 예측되는 질문은, 오늘 저 안 만나셨으면 뭐 하고 계실 시간이에요? 처럼 세련되게 다듬자.


좀 더 패기가 있다면 아까 말한대로 한 번도 안 들어봤을 질문을 던져 승부수를 띄워라. 상대는 대답을 고민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처음 해보는 생각들을 하게 될 거다. 다름 아닌 오직 너 때문에.


주로 친구들은 어디서 만나는 편이세요?가 본 질문이라고 하자. 짧고 명료하니 좋다. 근데, 가치 있는 정보를 수집할 질문인가? 알아서 뭐하지? 맨날 그 역 근처 서성이게? 네 주 활동무대랑 겹치면 맛집 리스트 크로스체킹 하려고? 동호회 할 거 아니잖아. 우리 감성 한 스푼 끼얹어서, 이렇게 묻자. 좋아하는 지하철역 있으세요? 까지 말하는데 동생이 말을 끊는다. 너무 멀리 간 거 아니냐고.


인정한다. 듣기에 따라 약간 변태 같을 수도, 4차원 같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질문을 고집스럽게 고집한다. 이유인즉슨 나의 완벽한 사심 때문이다.


내가 요즘 저 질문을 받고 싶다. 좋아하는 지하철역이 있냐는 물어봄을 당하고 싶다. 그런데 이렇게가 아니면,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동생 살리는 김에 나도 살려봤다.


언니는 그 질문이 왜 듣고 싶은데? 내가 물어봐줄게. 좋아하는 지하철역 있어? 오, 이렇게 엎드려 질문받기를 다해봅니다.


난 옥수역에서 압구정역 좋아해. 옥수역이면 옥수역이고 압구정역이면 압구정역이지, 옥수역에서 압구정역은 뭐냐며, 제 고민 상담에서 한층 멀어진 대화 방향에 동생은 심통이 난 듯했으나 노 알 바. 그러건 말건 난 생애 처음 받은 고대해온 질문에 답하고자 몰입했다.


나는 옥수역에서 압구정역. 정확히는 그 사이. 반대로는 압구정역에서 옥수역 가는 사이. 그 구간을 사랑해.


줄곧 컴컴한 터널이다가 압구정역에서 옥수역으로 가는 그때만 딱, 밖으로 깔린 철도를 달리거든. 그 풍경. 감정은 여느 지하철, 다른 역에서 느껴본 게 아니야. 그런 생각도 했다. 아이슬란드에 가서 오로라를 보면 이런 기분일까. 감히 아이슬란드의 오로라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본 적 없으니까 이게 더 황홀해. 이거 마치 별을 도시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놓은 느낌이야.


난 원체 서울 지리는 깜깜이라 무슨 대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그 위에 줄 지어선 차들. 멀리서 보면 얼마나 정갈하고 평화로운지 몰라. 그 아래로는 생선 비늘 같기도 보석 단면 같기도 한 모양을 입은 한강물이 셀로판지 색을 띄고 켜켜이 찰랑여. 그 일렁임을 한켠에 빽빽힌 늘어진 부촌의 집들이 바라보겠지. 여기까지만 해도 근사한데, 그 너머에도 또 있어. 앞의 집들과는 상반되게도 조금 남루한 또 다른 삶의 터전들이 오밀조밀 들어서 있거든. 근데 눈에 보이는 그 많은 것들 어디에도 내께 없다. 그게 되게 초라하다가 황량하다가, 결국엔 이국적이어져. 꼭 나의 이방인들의 도시를 여행객들의 기차에서 한 뼘씩 훔쳐보는 기분이랄까. 그 광경을 지하철 창문 프레임 안에서 본다는 거. 그게 가장 하이라이트야.


나는 그 구간에선 에어팟도 빼고 스마트폰도 보질 않아. 멋모르고 폰을 보다 우연히 그 지점에서 고개 든 사람들? 그대로 멈춘다. 그러곤 나랑 똑같은 표정으로 얼마간 관광객이 돼. 그 순간 생각해. 아. 우리가 스마트폰 없이도 지하철에서의 시간을 날 수 있는, 아직은 얼마든 비문명적일 수 있는 종족이구나.


괜히 물어봐줬다와 질린다는 표정이 공존하는 얼굴을 한 동생이 어쩐지 안쓰러워 일단 말을 멈췄다. 아마도 이 질문은 그 사람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너는 분명 3호선을 타게 될 때면 너도 모르게 옥수역에서 압구정역, 압구정역에서 옥수역을 향해 내달리는 그 구간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제 알았겠지? 대화에서 질문이 이렇게나 중요한 거다. 이유를 내가 몸소 보여주었으니 이 훌륭한 선행학습을 교재 삼아, 부디 그 사람에게 한 획을 긋는 유일무이한 질문을 네 차지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뜻대로 바라는 관계를 정립한다면 언제고 꼭, 해 질 시간의 3호선을 타고 옥수역에서 압구정역 그 구간을 지나가봐. 에어팟은 빼지 말고 한쪽씩 나눠 껴. 바로 로맨스가 너희 둘에게 덤비나니. 나한테 또 한 번 고마워질 거야.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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