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들은 오늘 저녁은 또 뭘 해 먹어야 하나, 그 걱정에 몰두하실 시간. 난 오늘 저녁은 또 뭘 써야 하나를 궁리한다.
내게 글 쓰라고 등 떠미는 사람이나, 내가 글 쓰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로 무언가를 쓰기에 아주 부담 없는 상황.
허나 되려 난 그게 부담이다. 글쓰기가 누구와의 약속도 아니라는 것. 그 말은 결국 나와의 약속이라는 뜻임을 익히 잘 알고 있고, 아울러 가장 지키기 어렵고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약속은 남 아닌 나와 한 것이라는 점까지 빠삭하니 말이다.
혹자는 그럴 수 있다. 아무거나 쓰면 되지 않나?
심한 말 심한 말!
본가에 가면 엄마에게 하는 말대답 중 그것이 있다. 뭐 먹고 싶어? 뭐 해놓을까?" 극상의 따뜻함이 녹아든 질문에 나란 딸 세상 심드렁히 답하길. “아무거나"
아무거나. 엄마는 그리 생각하신 적 없으시대도 나는 새삼 반성이 된다. 아무거나라는 한 마디가 얼마나 불효였는지. 엄마를 얼마나 외롭게 하였는지 알 것 같아서. 아무거나란 말은 홀로 서울에 떨어져 늘 측은한 큰딸에게 맛있는 집밥을 해주고 싶은 엄마의 사랑을 나 몰라라 하는, 나잇값 못한 어리광이자 엄마의 고뇌를 엄마의 몫으로만 돌리는 아주 이기적인 한 마디였다고 정의 해버리니 더욱 그렇다.
가정해보자. 쓸 거리가 없어 고심하는 나에게 누군가 아무거나라고 해버린다. 나는 그 순간 넓디 너른 사막에 광활한 우주에 혼자 남겨지는 적막과 고독을 이 몸 부서져라 체험하게 될 것만 같다. 한껏 과장해서 쓰자면 말이다.
그런데 이쯤되니 스스로도 약간 의아하다. 쓰라고 등 떠민 이도 언제 쓰나 목 빠지게 기다리는 이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고민하며 쓰기를 고집할 일인가?
고집할 일이다. 연초라 그렇다. 내가 새해를 맞아 론칭한, 몇 안 되는 다짐 중 하나가 이것이기 때문. 특이사항이 없는 한 1일 1 쓰기를 브런치에서 하는 것.
어쨌거나 오늘은 써야 하는데 쓸 게 없다는 나의 막막한 빈곤을 소재 삼아, 작심육일의 위기를 넘겼다. 쓰는 일은 늘 이렇게 생각을 정제하고 나를 정비할 수 있게 해주니, 고맙고 귀하다. 그래서 더 1일 1쓰기를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의 쓰기가 불러온 나비효과, ‘아무거나’에 관하여 정리하는 것이 도리일 터.
내가 무심코 했던 아무거나라는 말이 상대를 얼마나 쓸쓸하게 했을까. 나의 아무거나는 적지 않은 날, 상대에게 부담 가지지 말라는 배려였지만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작동할 수 있는 말이었겠구나. 미처 알지 못 해 미안하다.
어떤 날엔 딸의 불효였고 어떤 날엔 친구의 불친절이었으며 어떤 날엔 타인의 이기심이었을 ‘아무거나’.
그래도 오늘 저녁은 그 불효, 불친절, 이기심 덕에 이렇게 한 번의 쓰기를 건사했으니. 고맙다 아무거나! 오늘만큼은 네가 내게 더없는 친절이자 호재였다. 그렇다고 기쁨에 취하지만은 않을거야. 안도하기 이르거든. 왜냐하면 말이지. 내일이 밝아올 거니까.
그래서말인데, 나 내일은 또 뭘 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