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같이 내 머리는 오랜 시간, 꽤 길었다. 지금은 사진보다 더 긴 편으로 오늘 기준, 허리를 조금 밑돌지만, 흔히들 말하는 뭇남성들의 이상형인 긴 생머리의 여성 같은 그런 건 아니다. 본투비 반곱슬로, 현대의 기술력과 나의 꾸밈력이 해낸 세팅에 힘입어, 밖에서는 찰랑이는 척 사회적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요즘처럼 머리길이가 허리선에서 놀게 된 건 최근 일이 년 사이의 일이지만, 서른 이후로는 쭉 날개뼈 아래였으니 늘 길었던 셈. 날 처음 보는 사람도, 볼 만큼 본 사람도 꼭 한 번은 묻는다. 관리하기 안 힘드냐고.
정말 순수하게 관리의 난이도가 궁금한 거라기보단, 관리가 힘들 건데 어떻게 이렇게 길렀고, 왜 이렇게 기르며, 어찌 그걸 유지하냐는 질문임을 아는 바.
해서 나는 위 물음에 말도 마셔라. 감고 말리고 세팅하고 늘 곤욕이라 답하며 빼먹지 않고 이 말을 덧붙인다.
여자들 나이 들면 단발이나 커트 많이 하잖아요. 저희 엄마만 봐도 그렇고. 혹시 어머님도 짧은 머리 아니세요? (끄덕끄덕) 그래서요. 저도 나중엔 그럴 거 같아서, 기를 수 있을 때 긴 머리 계속해보려고요.
그 연유 덕에 생존 중인 이 긴 머리는, 볼 때야 어떨지 몰라도 모든 순간 고생이다. 감고 말리고 세팅하기에 이어 묶을 때도 그렇다. 묶는 게 일인 건 나의 풍성한 머리숱 탓인데, 이 튼실한 걸 묶고 있노라면 위에서 툭 떨어지는 머리카락 무게가 상당해 목이 꽤나 아프다.
지금이야 많이 덜해졌지만, 전성기 땐 소위 말하는 똥머리를 하면 애들이 너는 웬 가체를 하고 왔냐 놀릴 정도의 숱이었으니. 빠졌다고 해도 여전히 많은 편. 해서 아직도 웬만해선, 여름에조차도 묶지 않고 있다.
진심 왜 저러고 살까 싶기도 한데, 머릴 기른 건 내 선택이고 숱 많은 건 복인 셈이니. 그에 따른 고생길은 기쁘게 걷는 중이다. 이 머리칼로 인한 고충은 나 혼자만의 몫이니 힘들고 귀찮아도 노 프라블럼이기 때문.
그런데 두둥. 글쎄 어젯밤. 머리를 이젠 잘라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나의 머리카락이 남을 괴롭게 하는 신박한 일을 겪은 것이다.
어젯밤 지하철. 에어팟을 꽂고 평소엔 손 아파 잘하지도 않는 앱테크에 웬일로 몰입을 하고 열중을 했는데, 그러는 내내 어딘가 싸했다. 방금 탔는데 무조건 여기 어딘지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웬걸. 아니나 달라. 여자의 촉이란, 침대만 과학이 아니었으니. 별생각 없이 돌아본 출입문이 내려야 할 역에서 대단히도 활짝 열려 있었다. 그건 곧 닫힘이 임박했다는 뜻. 다시 말해 나에게 주어진 시간? 고작 몇 초인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인생 한 번 기구하지. 슬로모션 걸릴 일이 없어서 이런 때 걸리나. 휙- 고개 돌려 목격한 장면을 시신경이 뇌로 전달해 정보로 인식하는, 그 찰나의 로딩이 어찌나 억겁 같았는지 모르겠다.
가까스로 문 닫히기 직전 후다다닥 성공한 하차에 자축 겸 안도하려는데. 응? 닫히는 문의 그 귀여운 틈 사이로 한 여성분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봤어? 나 지금 저 여자 머리로 싸대기 맞았어“
아... 저기, 제가 때리려던 것은 아니고요… 그게 그러니까… 나도 모르는 새 나의 검은 머리가 저지른 폭행.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란 말이 생겨난 것일까. 왜 평소엔 않던 찰랑거림을 남의 귀한 여자친구분 뺨 앞에서 한 방에 하고 난리였을까.
나 자신의 벙찜은 일단 나중 문제. 엉겁결에 지하철 빌런이 됐음에 서둘러 사과의 고갯짓이라도 하려 뒤돌았으나 아아, 나의 기관사님은 갔습니다였다.
집으로 가는 길. 어찌나 미용실 간판만 눈에 들어오던지. 만약 어제가, 긴 머리가 세상 무덥고 거추장스러운 여름이었다면 곧장 아무 샵으로 직행했을 정도의 자괴감과 미안함이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여름이 아니어서. 세상 고마웠다. 겨울이어줘서.
그렇다. 아직 난 내 머리칼을 내칠 자신이 없었다. 그 이유를 진실로 말하자면, 자기 객관화 살벌하니까. 짧은 머리 안 어울릴 걸 너무 아는데 어떻게 잘라요. 그 이유를 넉살 좋게 말하자면 효녀니까. 신체발부 수지부모인데 어떻게 잘라요.
어젯밤 9시경, 3호선 상행선에서 불미스러운 사고를 겪으신 여성분. 심심한 사과드립니다. 본의는 아니었어요. 앞으로 공공장소에서 고개를 돌리는 일에 보다 신중을 기하겠습니다. 액땜했다 생각해 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