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병원에서 환자 말고 제자

by 씀씀


병원에만 갔다 하면 뭐 하나씩을 배워 온다. 아파서 간 병원이니 서둘러 진료만 받고 오면 되지. 왜 자꾸 때아닌 걸 배워오지 했던 게 벌써 세 번째니, 한의원, 정신의학과에 이어 이번엔 내과다.


병원에서의 배움이 체질인가보다 하자니, 내 두뇌와 의대 갈 머리와의 거리가 멀어도 너무 무한히 멀기에 그 이유는 아니다. 근데 뭐 이유를 몰라 답답은 해도, 내 거 버리고 오는 것도 아니고 채워 오는 일이니 손해는 아닌 데다, 병원표 배움이란 것들이 메시지까지 꽤 가졌던 바니. 병원? 앞이빨 빼고 모조리 배워주겠어.


면역력이 바닥에서도 바닥을 치고 있었는지, 보름 전 나흘을 앓은 몸에 또다시 비슷한 균이 터를 잡았다. 이게 홀로 악전고투하면 잠잠해질 싸움인지 병원을 등에 입어야만 끝 날 승부인지 아는 데엔 도가 튼 몸.


이번 건 무얼로 보나 후자길래, 조퇴 후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이 글의 문제적 장소이자, 나의 세 번째 배움 병원이 된 내과로.


급증한 감기, 독감 환자에 병의원이 북새통이란 뉴스는 본 바. 어차피 기다려야 한다면 잘 보는 병원에서 한 번에 끝내고 싶던 참에, 지인에게 우리 동네에서 오래된 내과를 추천받았으니, 무려 30년도 더 된 곳이었다.


대기 환자 수에 놀라 찍었던 것으로,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입장과 동시에 아연실색. 대기실 빈 곳이 없었다. 더 충격인 건, 그 만석도 대기시간 동안 다른 일을 보러 간 환자들로 그나마 공백이 생긴 인구밀도라는 것.


가만 앉아 보고 있노라니, 한 동네에서 30년 넘은 병원임이 체감됐다. 기다리시는 모두 연세가 지긋하신 게, 오랜 세월 이 병원만 다니신 듯했으니 말이다.


그 연륜들에 속하기에 맨날 나이타령 하고 자빠진 나는 새파랗게 어린 게, 여물지 않은 이방인 따위였으니, 열로 아득한 정신과 미지의 존재가 찌르는 근육통에 비스듬해지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파봤자 내가 얼마나 아플까. 어르신들도 꼿꼿하신데 내가 뭐 어찌 감히.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라 얼른 집에 가 눕고 싶단 생각만 간절하면서도, 그 기다리는 시간이 또 힘겹지만은 않았다. 대기실 안의 휴머니즘 때문이었다.


내가 봐온 병원 대기실 대화란 주로 접수, 진료, 처방, 수납 등에 관한 문답이었다. 부수적인 내용이 있어도 결국엔 진료 카테고리에 담기는 것들. 이 병원도 당연지사, 마찬가지였는데, 잉? 그리고는, 그것 말고도, 말이 오가는 게 아닌가. 근데 그 말이 위 문답이 아니네? 진짜 대화네? 근데 자연스럽기까지 하네? 놀랍잖아.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싶어, 내겐 생경한 모습.


염색하셨네요? 색 잘 나왔다. 엄마가 직접 하시잖아요.

- 너무 눈에 띄지 않아? 딸은 한 소리 할 거 같어.


아버님 오늘껀 미수금 달아놔요?! 다음에 내세요.

- 그전에 집사람 오거든 집사람한테 받으시고요.


일 보고 오셨는데도 차례가 안 되셨네.

짜장면 어서 드셨어요. 맛있게 드셨고?

- 요 앞에 왜 골목 안에. 근데 맛이 옛날보다 못 하대?


여긴 어디. 병원 맞음? 사랑방 아님? 환자 외모 근황부터 가족 관계, 잠깐 사 먹은 짜장면에 대한 만족도까지 챙기는 간호 쌤들과 그 관심에 무심한 듯 반갑게 화답하는 어르신들. 거기에 미수금까지. 병원에서 그런 신뢰관계가 가능하다고? 여기가 2025년 서울 맞다고?


병원스럽지 않은 공기는 진료실에서도 매한가지.


홈페이지에서 뵌 사진보다 패인 볼살에 새하얀 머리. 세월을 품은 노의사와 어떤 건 먼지, 어떤 건 손때 쌓인 역사가 보이는 소품들. 차트를 기록하는 타닥타닥 정겨운 박자감의 귀여운 타자 속도. “약을 꼭 밥 먹고 먹어야 해요! 그게 중요해요. 그래야 또 안 오지! “ 네네 원장님이 아닌 네네, 할아버지라 부를 뻔한 따뜻함.


포털을 검색했더라면, 이 병원에 오기 힘들었을 거다. 광고성 글 등으로 공격적 홍보를 하는 병원을 이기고, 이 오래된 병원이 내 눈앞에 쉽고 빠르게 노출되기란 쉽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평일에 또 오긴 어려울 듯 해 5일 치 약을 타온 길. 그 안에 낫는다면 좋겠으나, 만약 그렇지 않아 다시 병원에 가야 하게 된다면, 그땐 주말이라 진료까지 더 험난한 대기가 각오돼야 하겠지만, 그 부분이 첫 내원 전처럼 걱정되고 짜증스럽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날에도 간호사 쌤들이 지키실 대기실에는 어르신 가득일 것이고. 그 안에선 기침 소리를 힘 잃게 할 따순 안부가 오갈 것이며, 누구에겐 오랜 이웃 누구에겐 인자한 할아버지일 진료실 안의 노의사는, 모두의 주치의가 되어 본인과 또 안 만날 방법을 강조하고 계실 테니. 거기서의 나란 어김없이 저항 없이 또 무언가를 뜨겁게 배울 수밖에 없는 지라 그렇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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