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원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은 이유를 알았다

by 씀씀


산과 바다, 짬뽕과 짜장 중 고르라는 것처럼 주사와 침 중에 고르라 한다면, 나는 일말의 고민 없이 주사파다.


이유를 굳이 꼽자면 두 가지. 첫째, 살면서 맞아야 할 웬만한 주사는 이제 다 클리어했다는 치사한 계산이 서서. 둘째, 주사는 간호사 쌤의 손 끝에서 울리는 경쾌한 '짝짝' 소리에 맞춰 한 번의 '따끔' 또는 '뻐근'만 참으면 상황 종료인 반면, 침은 따끔따끔따끔 뻐근뻐근뻐근...


그렇다고 마냥 침을 피하기엔, 침술의 효능이 기가 막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침술 그것은 마치 무더운 여름날 뜨거운 국밥을 먹으며 시원해하고, 절절 끓는 아랫목에 누워있으면서 아구구 시원해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분명 아픈데 이상하게 시원하고 확실히 찌릿한데 희한하게 통쾌한 것. 뭔가 나아가는 과정까지 치료이자 치유인 느낌?


그날, 십몇 년 만에 한의원을 찾게 된 것 역시 과거의 경험에서 축적된 그 데이터 때문이었다.




강산이 변한단 세월에도 한의원은 그대로였다. 조금 세련 돼지긴 했으나 여전히 푸근한 게 꼭 서울에서 만난 고향 친구 같은.


신기한 건 여전히 손님, 그러니까 환자들이 꽤 됐다는 것. 생각해 보면 어느 한의원이든 갈 때마다 환자를 못 본 적이 없었다.(허준 선생님, 보고 계신 거죠?!)


"어디가 불편하세요?"

"아유,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동안"

"아이고 이렇게 딱딱하면. 여기도 힘들었을 텐데"

"침 맞으면 한결 편안해질 거예요"


쌤... 무슨 일인 거죠...?

어쩐지 저는 이미 편안해진 것 같아요...


현대인의 고질병이자 직장인의 숙명인 일자목과, 그 후폭풍을 정통으로 맞고 있는 승모근들아! 내 오늘 너희에게 잠깐이나마 위안과 격려를 전하리라.


다행히도, 염려했던 따끔 뻐근한 침의 행렬을 순탄히 보내고, 긴장이 풀린 채로 따끈한 침대에 누워있자니 세상 노곤한 게 여기가 천국인가 싶은데 옆자리 환자 분과 의사 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번 주엔 괜찮더니 무릎이 왜 그럴까요?"

- 어제 마트를 갔었거든요

"아, 쇼핑이 원하시던 대로 잘 안 되셨구나"


응? 뭐지.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이상한 대화였다. 그러니까 무릎이 왜 아픈 거냐 물었고 어제 마트를 가서 아프다고 말했어. 근데 거기서 바로 쇼핑이 잘 안 되셨나 봐요가 나온다고?


아무리 뛰어난 핑퐁러라 해도, 보통 저 흐름에선 마트에 갔는데 왜요? 또는 마트에서 넘어지셨어요? 정도가 최선이지 않나?


그런데 지금 이건 웬걸. 마트에서 하도 돌아다녀 무릎이 말썽이라는 걸 바로 알아들은 걸로 모자라, 마트에서 오래, 많이 걸으셨나봐요라는 말을 '쇼핑이 원하시던 대로 안 됐나봐요' 라는, 굉장히 고급지고 감성적인 표현으로 구사했으니. 대체 저건 어느 레벨의 공감 능력과 센스인 거지.


- 너무 힘들었어요. 애가 안 되는 것만 사달라고 어찌나 조르는지 몇 바퀴를 돌았..


옆 환자는 기다렸다는 듯, 딸내미 때문에 고생한 얘길 시작했다. 어제저녁, 나 역시 마트 바닥에 드러누 워 떼를 쓰는 여자 아이를 본 것 같은, 아니 반드시 꼭 무조건 봤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릎이 아파서 오신 건 맞겠지? 맞을 거야...

가슴이 답답해서 오신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침술실에서 때 아니게 펼쳐진 다이나믹한 장보기가 끝나고 내게로 온 쌤은 여기저기 쿡쿡 눌러보더니, 느닷없이 여긴 이렇게 저긴 이렇게 하라며 스트레칭을 알려주고는, 침 맞으면 편해지긴 하지만 나을 수는 없다며 귀찮아도 평소에 스트레칭을 꾸준히 하라는 폭풍 잔소리를 한참이나 늘어놓으셨다. 어... 엄마...?


"치료는 짧고 생활은 길어요. 스트레칭해야 낫습니다? 또 안 봬야 좋은 건데 부탁드려요"


수납하고 나오는 길에도 환자들은 여전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특히나 많이 계신 모습 또한, 내가 익히 알던 한의원의 풍경 그대로.


여긴 진짜 변한 게 없구나. 추억 하나 없는, 태어나 처음 와 본 이 동네 한의원에 내게 익숙한 장면들이 왜 이리 많담. 신기한 일이었다.


이런 날(십 여 년 만에 한의원 간 날)을 기념하지 않을 수 없지. 친구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래서 병원서 뭐라는데?"
- 치료는 짧고 생활은 길대"

"뭐라는 거야"

- 또 안 봤음 좋겠대"

"뭔 소리야 진짜"

- 아 몰라. 의사 쌤이 말을 너무 잘해. 그리고 치료는 둘째치고 공감을 진짜... 마음이 되게 그랬어. 내 몸 아픈 거 나나 서럽지 누가 관심 있어. 근데 뭔가 달라. 직업 이상으로 맘 써주는 느낌? 이건 뭐 몇 번 가면 쌤이랑 친구 될 기세야

"왜 그래서 한의원에 연세 드신 분들이 많이 가신다잖아"


맙소사. 순간 주책 맞게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게 그런 거일 줄이야. 나는 그저 어르신들이니 침 맞고 뜸 뜨시는 게 더 좋고 편하셔서 그런가 보다 했거늘. 생각지 못 한 말에 마음이 저릿했고, 니가 미쳤구나라는 친구의 말이 들려온 건 이미 눈물이 떨어진 후인걸 어쩌겠는가. 계속 우는 수 밖에.


부연설명 같은 건 없어도 됐다. 치료도 치료지만 내 아픔에 공감해주고 귀 기울여주고 그런 게 더 필요하다는 게 뭔지, 그리고 그 과정 자체를 그저 즐거운 대화라고 여기며 임하는 그 마음이란 또 어떤 건지도 너무 잘 알 것 같았으니까.


침 한 번 맞으러 갔을 뿐인 일에 나 이렇게 큰 걸 얻어도 되는 건가? 이건 뭐 내가 계산한 건 진료비가 아니라 인생 수업료였던 셈이 됐으니.


그러고보니 가만, 내 옆에 그 아주머니 환자분은 어떠시려나? 모르긴 몰라도 왠지 그 분도 나만큼이나 기분 좋은 저녁을 보내셨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머 여보, 나 무릎이 너무 멀쩡해서 내일 당장 마라톤도 문제없겠는데? 호호호 하면서 말이다.


어쩐지 그 한의원 진료기록엔 어려운 의학 용어 말고 이런 얘기들이 적혀 있을 같은 건, 내 기분 탓일까?


| Date. 2021. 10. 13.

아주머니 환자: 전날 마트에서 집에 있는 인형을 또 사달라는 딸을 달래느라 장시간 쇼핑, 무릎 통증 발생하여 내원. 딸에게 다음 주에 언니랑 같이 와서 더 예쁜 걸 사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잘 까먹는 딸이 깜빡해주길 기대하고 있음
씀씀 환자: 일자목 통증으로 내원. 스트레칭 알려주고 꾸준히 하라 하였으나 대답에서 의지가 전혀 엿보이지 않음. 침은 계속 맞아도 나쁜 건 아니냐고 묻는 걸로 보아 스트레칭은 안 하고 계속 내원할 것으로 예상. 추후 침술을 줄여가면서, 환자 본인이 스트레칭으로 통증을 경감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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