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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고, 화초가 나를 키웠습니다

by 씀씀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동네가 필요하단 건 알았어도, 나를 키우는 데에 우리 부모님으로 모자라 화초까지 필요할 줄은 내 미처 몰랐네.



나를 키운 식물을 소개한다.


먼저 시선강탈히는 저 빨강의 이름은 열매. 색만큼 이름도 예쁘다. 그다음 녹색은 본인을 받쳐 열매를 돋보이게 하는 매너가 돋보이는 친구로, 이름은 멀티. 줄기 색도 되고 이파리 색도 되는 멀티플레이여서 그렇다. 이제 남은 건 왼쪽 위에 아주 쪼그만 연두색인데, 얘 이름은 다중. 맞다 다중인격의 그 다중. 이유인즉슨 이름부터 역할까지 퍽 많기 때문이다.


연두색을 발견한 건 열흘 전쯤. 당시엔 더욱 미니미니 사이즈였는데,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게 이렇게도 적용되나? 세상 짝아서는 잎처럼 생기지도 못한 게 어찌나 존재감을 드러내는지. 될 성 부른 떡잎은 알아본다더니, 얜 내가 딱 알아봐 버렸지 무언가.


강렬한 첫 만남만큼이나, 연두색이 내게 갖는 의미는 엄청났다. 어머? 이게 뭐야 하며 눈에 띈 순간, 무슨 브레인스토밍 하듯 자동적으로 연두색의 다른 이름이 앞다퉈 떠올랐을 정도니 말이다.


맨 처음 반사적으로 생각난 이름은 생명. 아직도 기억난다. 수줍게 올라온 여린 연두 줄기를 보고는 남몰래 혼자 코 찡해져서 숙연해졌던, 사무실과는 굉장히 안 어울리는 감정과 조우했던 그 순간이.


생명 다음으로 연두색의 이름이 된 건 고마움. 이런 척박한 환경. 무지한 주인의 투박한 관심 속에서도 또 잎을 틔워준다니,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오늘 생긴 연두색의 이름은 봄. 일단 색깔부터가 본투비 봄 자체인 것도 있고, 오늘이 마침 춘분이니 그 버프를 받은 것도 있겠으나 중요하진 않다. 연두는 그냥 움텄다는 것만으로 이름도 의미도 열린 결말인 존재니까.


나이 들면 식물이 좋아지고 작은 거에도 감동 받는다더니. 나 왜 어머님들 프사가 왜 다 꽃인지 이해 못 했는데. 내 프사로는 무슨 꽃이 좋을까? 생각을 할랑 말랑 하게 되는 내 자신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게, 아까 사무실에서 저만큼 자란 연두색을 보고 진짜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까지 쓰는 것만 봐도 그래. 이럴 일이야 이게?


사실 다 찐인데도 대단히 멋쩍다. 나는 이 작물의 품종이 무언지도 모른다. 이 친구는 몇 해 전. 사무실에 너무 녹색이 없다며, 화분 하나씩 키우자며 공동체 생활에 따라 들이게 된 것으로, 세 종류 화초 중 내가 고른 것임에도 얘의 정체성을 전혀 기억 못 한다.


그렇다고해서 방치한 것은 아니다. 내가 기울일 수 있는 애정은 알뜰살뜰 주었다. 헌데 만약 겉모습이 그 정성의 척도라고 한다면, 나는 순순히 두 손 들겠다.



그 이유는 사진과 같다. 보이는 그대로이기 때문. 타고나길 잘 타고난 거지, 애 행색은 영… 제대로 된 물받이 하나를 못 챙겨줘서 커피 캡슐 통의 스테인리스 뚜껑을 받쳐놓질 않나. 너무 잘 자라 옆으로 쓰러지는 줄기를 받쳐줘야 하는데, 그걸 빨대에 칼집 내는 꽂아주는 걸로 대신하질 않나.


그런데도 그 흔한 일광욕, 영양제, 제 애칭 적힌 푯말 하나 없이도 이렇게까지 훤칠하게 커줬다는 게, 진짜로 되게 감동이라, 무슨 혼자 알아 다 커서 대학 간 자식 입학식 때 처음 사진 찍는 마냥, 찍어버렸다.


꼭 그런 것 같다. 물 거르지 않고 준 것 말고는 한 게 없습니다. 잘 자라란 말도 부담될까 삼켰어요. 한 번씩 들러 괜찮나 살피기만 했습니다. 자라는 내내 남들 하나씩은 다 해봤다는 좋은 흙, 볕, 양분 같은 사교육 하나 못 시켜줬는데 이런 훌륭한 결실을 맺게 되다니. 흐업.


이런 감동과 반성을 했다고 해서, 이제 와서 분갈이? 해주고 물받침 근사한 걸로 바꿔주고 삐까뻔쩍한 지지대 세워주고, 막 푯말까지 박아주고 그러진 않을 거다.


다만 한 가지. 김춘수 님의 꽃이라는 시에 나는 절대 동감하는 바. 이 친구도 나에게로 와 꽃이 될 수 있게, 부를 이름 하나 지어주려고 하니. 고심 끝에 정한 이름은

춘이다. 성은 회. 회사에 있는 애고, 지금 춘삼월이니 줄여서 회춘. 부르기도 정겹고 귀엽다. 춘아. 춘이야.


너에게도 나에게도 서로가 회사에서의 봄이었으면 좋겠다. 서로로 인해 회춘까지 하면 더 좋고. 그거 아니? 사람 인생 이름 따라간다잖아? 그거 사람만 그런 거 아니다? 식물들도 그래. 그러니 넌 계속 젊음일 거야. 앞으로도 이 어르신만 믿고 따라오렴. 잘 키워줄게.


너가 자랐을 뿐인데 내가 컸다. 네가 잘 키워줬어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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