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 주말. 모처럼 2차까지 납셨으니, 날이라면 날이었을까.
신기하게 그날이 날인 건 나한테만은 아니었나 보다. 어려운 경기가 피부까지 향할 것도 없이 속눈썹에서부터 느껴지는 작금에. 거리며 가게에 뭔 사람이 그리 많던지. “오늘 뭔 날이야?” 하며 정해둔 2차 장소로 들어섰으니.
그 집 역시 대강 봐도 만석 5분 전인 듯한 인구 밀도. 자리 있냔 물음에 몇 명이냔 질문을 답으로 돌려받은 결과, 다행히도 우리 몫의 자리가 있다기에 좋다구나 들어가는데 읭? 뭔 숭한 것이 발목을 잡는 게 아닌가. 근래 겪은 적 없는 아주 숭한 것이 말이다.
“네?”
점원의 말 그 워딩을 정확히 들었음에도, 무조건 반사식으로 나온 나의 반응은 내 의지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다른 거면 몰라. 하고 많은 거 중에 글쎄 신분증을 보여달라니. 동방예의지국에 어찌 이런 실례가 다 있단 말인가.
뭐 세상이 우주 먼지에 불과한 날 두고 하는 몰래카메라야? 가게 이벤트야?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아니 있어야 할 거야. 없다면 이건 어른을 농락하는 거야.
“ㅅ..ㅣ..신.. 신분증이요?”
“네, 신분증 보여주세요”
왜요. 뭐요. 어째서 지지 않으시는 건데요. 날 얼마나 더 초라하게 만들 셈이세요. 아 혹시 이게 젊은 친구들 말로 입뺀, 그건가요? 그거의 방법인 거에요? 말을 해줘요. 대간절 2025년 한복판에서, 86년 범띠를 두고 무슨 신분증?
“아하하하핳, 저 나이 되게 많아요!“
나 홀로 고군분투가 짠해보였던지 친구가 거들기를
“진짜예요. 얘 나이 진짜 많아요”
죽이까…
“제가, 저 86년 생. 86년 생이예요“
86아시안게임도 모를 것 같은 친구한테… 86년생밍아웃. 다행히? 그 한마디로 상황은 금세 정리됐으니. 점원 분은 생각도 안 해 본 두 자리 숫자의 향연이 진정성 자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더는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고 자리를 안내해 줬고 그렇게 모두에게 해피? 회피? 엔딩으로 종결.
뜻하지 않게 발견한 놀라운 국면은 나의 내면 세계였다. 그래도 한 십 년 전엔 신분증 보여달라하면 순간 당황은 하면서도 한 구석으론 짜릿하고 나 자신 기특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지금은 1초도 그러질 않으니. 뭐랄까. 오히려 청소년인데 이 얼굴 이 상태면…. 문제 있지라는 초하이퍼 리얼리즘에 입각해 심각해진달까.
웃긴 이야기는, 그 2주 전에도 지금에도 내 카톡 프사는 서른 생일에, 어느 행성에서 어떤 생명체가 언제 보더라도 30세였구나 알게끔 30 초를 꽂은 케이크를 들고 찍은 10년 전 사진인데.
며칠 전 만난 동갑의 지인이 그 사진을 보곤 뭐 하는 거냐며 추하다고 곱게 늙자 하기에. 뭐 왜! 나 지난주에 술집 갔다 신분증 검사 당했어! 여기서 어떻게 더 곱게 늙어!라며 나도 모르게, 전혀 아무 감흥 없다던 그 일화를 방패로 삼았다는 점이겠다.
더 웃긴 건 내 그 이야기에, 같이 있던 다른 지인 말하길. 신분증 보여달라 한 건, 니가 어리게 보이니까 나이도 그럴까 봐서가 아니라 수배 중이거나 그 가게 먹튀한 이력이 있거나? 그럴 거 같아서 보여달라 한 거 같은데?
죽이까…
이제 짐을 챙겨 약속 장소로 떠나야 할 시간. 나이와 체력을 고려해 약식으로 진행되나, 불금은 불금.
오늘 약속 장소에서도 나의 신분증은 요구되어질까? 혹시 모르니 재미 삼아 챙겨보려 한다. 만약 오늘도 어린 점원 분이 효도 이벤트 해준답시고 신분증을 달라하시거든. 나 자신! 쭈굴대지 않고 이 시대의 멋진 어른으로! 86년 잉크 깔끔히 마른 민쯩! 내밀어 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