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만난 지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던 말을 두 가지나 들어버렸다.
'넌 왜 아들로 안 태어나서 엄마 속을 썩이냐.'와 '그럴 거면 내 집에서 나가.'
십 년 만에 듣는 말인데도 여전히 폐부를 쿡 비집고 들어오는 걸 보면 우리 할머니는 사람 속 뒤집는 데 일가견이 있다.
"전 그런 거 바라지도 않고,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들어갈게요?"
할머니의 허락이 있기도 전에 이미 신발을 벗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엄마는 긴장한 듯 보였지만 내가 현관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할머니의 또 다른 호통이 없어 이걸로 일단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눈물의 상봉 그런 건 기대도 안 했지만. 건강해 보이시니 좋네요."
"네년만 아니었어도 네 엄마랑 내가 이 고생하고 살 일도 없었어."
훠우.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는데.
가는 말은 고왔는데 오는 말이 곱지 않은 건 속담에 대한 반례라고 할 수 있나.
할머니가 우리 엄마를 들먹이는 것도 소위 패드립으로 분류할 수 있으려나.
머리 한 구석으로 킥킥 웃음을 참으며 무심한 표정을 짓고 집으로 들어섰다.
벽지 구석이 조금 들뜨고 누렇게 변한 것 빼곤 집은 무서우리만큼 변화가 없었다.
죽은 듯이 사는 사람들이 사는 공간은 공간마저도 생명력을 잃게 되어버리나.
"네 방 그대로 뒀어. 어차피 엄마랑 할머니 둘이 사는데 짐이 많지도 않고. 얼른 들어가서 짐 정리하고 나와. 엄마가 집에 있는 걸로 대충 빨리 저녁 해줄게."
"이미 음식 주문했으니까 엄마야말로 좀 쉬세요~ 할머니도 이번 기회에 바깥 음식 한번 드셔보시죠. 다 늙은 며느리 밥상 지겹지도 않으세요?"
"저 개도 안 물어갈 년."
참으려고 했는데. 할머니의 십 년 만에 처음 본 인사말이 고까워 나도 똑같이 되갚아주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 속 뒤집는 능력은 이 집안 여자들의 재능일지도 모른다.
십 년 만에 돌아온 방은 고등학교 때 모습 그대로였다. 책장에 여전히 꽂혀있는 수학의 정석, 개념원리 그리고 수능특강 책들까지. 엄마 성격에 내 물건 하나 내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둔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이런 건 좀 버리지. 불나면 장작밖에 더 되나.'
대강 큰 짐들만 정리한 뒤 내 방에 있던 잠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십 년 만에 입은 잠옷에선 여전히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던 엄마는 옷도 못 갈아입은 채로 냉장고 문을 여닫으며 온갖 반찬통을 꺼내고 있었고.
어느새 가스레인지 위엔 못 보던 솥이 올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엄마 김치찌개 한번 먹어야 하지 않겠어. 김치만 넣고 끓이면 다야 이것만 할게 진짜 진짜."
그렇게 엄마가 부랴부랴 끓인 김치찌개와 내가 주문한 피자의 기묘한 한 상이 차려졌다.
할머니는 엄마가 끓여준 김치찌개를 퍼먹으며 저런 느글대는 음식을 누구 먹으라고 주문했냐며 끊임없이 구시렁대었지만.
엄마가 피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할머니만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