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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Aug 11. 2024

시를 삼키는 마음

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예찬하며.

  저는 문학을 가르치는 국어교사입니다. 시나 소설 나부랭이가 세상에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학창 시절의 문학 수업을 그리워하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가슴속에 내 마음을 울렸던 문학 작품 하나 간직하고 계신 분들은 많을 겁니다. 저 역시 순수하게 문학이 주는 감동에 이끌려, 그 깊은 울림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실제 수업 현장에서의 요즘 아이들은 점점 '시' 읽기를 낯설어하고, 시보다 흥미롭고 자극적인 것들을 찾아 기웃거립니다. 자극적이고 현란한 화면의 영상들에 빠진 아이들을 바라볼 때면 마음 깊은 곳이 어딘가 움찔하면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집니다.

  아이들은 누구보다도 시인과 닮아 있습니다. 그네들의 마음에는 때 묻지 않은 하얀 캔버스가 있고, 무엇이든 새롭게 해석해 내고 관찰하고 표현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문학작품이 천대받고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된 것일까요?


  언제부터 문학이 삶의 도구가 되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어 배부른 자들의 쓸데없는 망상으로 여겨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 역시 점점 현실에 찌들어가면서, 문학, 그중에서도 특히 '시'를 읽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날들이 점점 줄어갔다는 것에 깊은 회한이 느껴졌습니다.


다음 시를 한 번 살펴보실까요?


프란츠 카프카 (오규원)     


-MENU-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쉴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위 시를 읽은 느낌이 어떠신가요? 딱히 뭐라 설명하긴 어려워도 씁쓸해지는 마음이 있으실 거예요. 시의 어느 부분이 가장 씁쓸하게 느껴지실까요? 혹은 어느 부분이 참신하게 느껴지실까요? 작가는 대체 이 시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는 프란츠 카프카가 값싸기 때문에 좋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요? 정말로 시를 공부하겠다는 제자를 '미쳤다'라고 느꼈을까요?


저는 이런 시를 읽으면 통쾌함을 느낍니다. 반어적이고, 언어유희적인 표현으로 세상사를 날카롭게 비판해 내는 능력은 탁월하기까지 합니다.


시를 공부하고, 시를 읽겠다는 마음은 세상 어떤 마음보다 귀하고 성스럽습니다. 수많은 천박한 세태들과 동떨어져, 세상 고고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고, 듣고, 읽고, 기억하겠다는 거침없는 의지의 표현이겠지요.

한동안 세상 모든 시를 다 읽어보고 싶었던 저로서도, 시집을 펼쳐서 한 장 넘기기가 버거웠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음이 세상에 찌들어져 사악하고 복잡해질 때는 감히 시집이라는 성스러운 물건을 들춰보지 못했습니다. 마치 켕기는 것이 있는 사람들이 신성한 공간에 범접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시집을 여는 순간에 저는 이런 느낌이 듭니다.

진흙 덩어리인 세상과는 별개의 저너머의 무지갯빛 세상으로 순간 이동하는 느낌이요.

어떤 날은 생업은 잘 해내지도 못하면서 시집이나 읽고 있으려니, 현실도피, 혹은 현실감각이 무뎌진 채로 삶에서 도망가는 죄책감마저 들기도 했어요.     

시 따위야 한량들이나 배부른 자들이 유유자적 즐기는 것 아니냐고 숨어있는 지킬박사가 외치는 것처럼 어떤 날들은 아주 오래도록 시집을 멀리했습니다. 마치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들에만 천착하는 것이 악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또 어떤 아름다운 봄날에, 분홍빛 자줏빛 다홍빛 철쭉이 흐드러지게 온 땅을 잠식하고, 손톱 위에도 작은 꽃잎 하나 올리고 싶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정신이 몽롱해지는 계절이 찾아왔을 때,

다시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울컥 치솟아 올라왔습니다.

 

그것은 자석 같은 끌림이어서, 운명이 이끄는 대로, 또다시
'시가 있어 다행이다./ 삶의 꽃 같은 그 순간들// 처절히 고통스럽지만/
또 은근히 아름답고 잔잔한 한낮의 비애가/ 시 속에 녹아 있구나' 느끼고 맙니다.


시인이거나,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한 번이라도 시를 읽고 마음에 깊은 감동을 느꼈던 분들이라면, 언젠가 또다시 시를 삼키게 되지요.


시는 그런 녀석입니다. 인생이 서글프고 한 없이 초라해진다 해도,
우리가 시를 읽던 아름다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며
삶은 이대로도 계속 아름답다고.
그러니 아름다운 당신 역시 삶을 포기하지 말고, 진실을 마주하라고.
우리를 가르쳐주는 고마운 선생님 같기도 합니다.


많은 시인들은 속절없이 힘들게 살아가셨습니다. 시를 쓸 수 있는 마음을 지닌 분들은 강인하지만 연약하고, 섬세한 분들이 많습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시인 기형도 시인도 마찬가지였지요.

윤동주 시인은 누구보다 순수하지만 강력한 방식으로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시가 지는 힘은, 칼이 지닌 공격성보다 때로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최근에 나태주 시인의 시가 유행입니다. 저는 그분의 댁에서 직접 연주하시는 오르간을 듣는 영광을 누려보았습니다. 저자 사인회에서 하루 종일 미소를 잃지 않으시고 사인을 해주시는 친근하고 인간적인 면모도 보았습니다.


시는 마치 시인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순수하고, 인간적이며, 멀리 있지 않고,
우리들 마음속에서 꽃 필 수 있는 것.
그래서 우리를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해주는 그런 것 말입니다.


'시를 삼키는 마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줬던 고마운 시 한 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

*

*


이병률 시인의 <시를 어떨 때 쓰느냐 물으신다면>이라는 작품입니다.



시는 쓰려고 앉아 있을 때만 써지지 않지


오로지 시를 생각할 때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물을 데우고

물을 따르는 사이


고양이가 창문 밖으로 휙 하니 지나가고

그 자리 뒤로 무언가 피어오르는 듯할 때

그때


조용할 때만 오지도 않지

냉장고가 용도를 멈출 때

저녁 바람이 몇 단으로 가격할 때


시는 어느 좋은 먼 데를 보려다

과거에 넋을 놓고

그러던 도중 그만 하늘빛에 눈이 찔리고 말아

둥그스름하게 부어오른 눈언저리를 터뜨려야

겨우 쏟아지는지도


쓰지 않으려 할 때도 시는 걷잡을 수 없이 방향을 잡지    

 

어디에 쓰자고 문 앞에 매달아 둘 것도 아니며

무엇이라도 되라고 등불 아래 펴놓는 것도 아니며

저기 먼 끝 어딘가에 이름 없는 별 하나 맺히는 것으로

부스럭거리자는 것     


흐렸다 갰다를 반복하는 세상 어느 골짜기에다

종소리를 쏟아 붓겠다는 건지도     


시는 나아가려 할 때만 들이치는 게 아니어서

멀거니 멈출 때

흘린 것을 감아올릴 때

그것을 움푹한 처소에 담아둘 때

그때     


어떠신가요?

좋은 시 한 편, 삼킬 마음의 준비가 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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