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고
업무 시간이 끝나갈 때쯤, 거의 대단원을 향해 가는 이 책의 마지막 몇 장을 읽는 일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서 사무실을 벗어나 저녁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가는 내내 책을 읽으며 걸어갔다. 그렇게 식당에 도착해 주문한 음식이 내 앞에 준비된 다음에야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나의 온 정신을 휩싸던 전율과 감탄을 표현하기 위해 나는 어떤 문장을 써야 할까.
이 책은 ‘전지적 작가 시점(혹은 3인칭 작가 시점)’으로 쓰였다. 작가가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서술 시점을 택하고 활용한다는 건 국어 교과서에서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다. 이 작품에서 서술자가 ‘전지적’이라는 점이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윌리엄 스토너라는 한 인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인생 전체를 한 편의 이야기로 다루어내는 솜씨가 ‘전지적’이라는 단어에 걸맞게끔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이라는 예술장르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그 중 대부분은 한 인간의 일생의 일부를 다루고, 몇몇은 한 생애 전체를 다루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가 그렇게까지 드문 케이스는 아니다. 한 인물의 탄생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소설은 아주 많다. 하지만 스토너가 특별한 이유는 마치, 윌리엄 스토너의 인생에 어느 순간부터 개입하기 시작한 ‘문학’이라는 존재가 목소리를 얻어, ‘문학’의 방식으로 스토너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스토너가 문학을 한 게 아니라, 문학이 스토너를 만나고, 지켜보고, 기록한다. 문학이 적어내려가는 문학은 참으로 ‘전지적’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란 없다는 듯한 표현력은 ‘전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스토너>는 참으로, 문학이 문학 내에서 뛰어노는 세상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사랑할 만하다.
나는 이 책을, 띠지 때문에 샀다. 어느 날 들른 영풍문고 신간 코너에 이 책이 누워있었고, 초판 디자인으로 리커버되어 다시 출간된 이 책의 띠지에는 신형철, 이동진, 최은영, 김연수의 추천사가 한 문장씩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한 번 펼쳐볼 것도 없이 이 책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중반까지만 해도 지루했다. 흔히 ‘고전’이라 불리는 숱한 백인 남성의 성장소설들과의 차이점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렇다 할 사건이나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분위기가 남다르거나 묘사가 뛰어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이 소설은, 재미있는데 분위기도 뚜렷하고 그 중에서도 묘사는 단연 독보적인 작품이 되어 있었다. 이 소설이 인생을 다루는 방식은 인생 그 자체와 너무도 닮아있어서, 과거의 기억은 전설처럼 아련하고 나중의 기억일수록 생생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펼친 뒤 한동안은 낯을 가리듯 스토너가 어색하지만 이 책을 덮었을 땐 내가 아주 오랜 세월을 함께한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을 떠나보낸 듯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하루아침에 신형철 이동진 최은영 김연수와 공통지인을 갖게 된 느낌이랄까.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두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게 있다면, 첫째로는 이디스에 관한 것이다. 작품이 전적으로 스토너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만큼 주변의 다른 인물들의 목소리는 상당히 배제되어 있는 편인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첫 등장부터 마지막까지 이디스가 보여주는 모습들은 전부 다 꽤나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소설이 주인공인 스토너를 기준으로 할 때 ‘반동인물’이라고 할 만한 인물들을 다루는 방식은 오묘해서, 그들을 단순한 악인으로만 설정하지도, 그렇다고 그들에게 충분한 서사를 부여하고 있지도 않다. 주인공인 스토너를 포함한 이 작품의 모든 인물들이 다른 대다수의 소설 속 인물들에 비해 감정의 폭이 좁고 지극히 관찰자적인 시선에 의해서만 묘사되어 있어 공통적으로 묘한 이질감을 주기는 하지만, 인생이란 다 이해할 수 없는 시간들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채 지나가는 것이듯, 그러한 방식으로 스토너의 일생을 다루어내기 위해 배제되었을 이디스의 이야기는 작품을 읽는 내내, 그리고 작품을 다 읽고난 뒤에도 한없이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디스 엘레인 보스트윅을 주인공으로 한 제2의 <스토너>가 쓰일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상상과 함께. 그런데 그렇게 그의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과 아쉬움을 간직한 채로 독서를 마친 나는, 놀랍게도 어떤 익명의 독자에 의해 완벽히 이디스의 시점에서 재구성되어 쓰인 이 책의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었다. 너무도 정확한 문학적 상상력으로 쓰여있어서 깜짝 놀랐다. 흔히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아이들에게 창의적 독서활동의 일환으로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의 입장에서 소설을 재구성해보는 과제가 주어지곤 하는데, 새삼 그런 작업이 한 번의 독서를, 그리고 그 작품 속의 세계를 얼마나 풍성하게 만들어주는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놀랍도록 유려한 번역이 아니었다면 이 책이 국내에서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소감을 가감 없이 표현하자면, 책의 번역이 너무 뛰어나서 해당 역자가 번역한 다른 책을 읽기 위해 검색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사건과 감정 자체를 뛰어넘는 매 문장의 풍성한 표현력들의 원어가 대체 무엇이었을지를 수없이 궁금해하며, 감탄하며 그것들을 열심히 옮겨적었다.
궁금하다. 내가 만약 내 생의 끝을 내 침대에 누워 천천히 맞이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면, 나는 나의 인생이라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와 같은 감격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책장을 넘기듯 겸손한 손길로 내가 머물던 세상에게 인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