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이네 집
물에 탄 시리얼
“어? 형철이는 어디 있지?”
달력으로 접은 비행기로 멀리 날리기 시합을 하던 지훈이와 친구들은, 형철이가 보이지 않음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깨달았다. 형철이를 포함해 네 명이 지훈이네 집으로 들어온 것은 분명했으나, 적지 않은 시간 세 명만 2층에서 비행기 날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갑자기 비행기 놀이가 숨바꼭질 놀이로 바뀐 듯, 세 친구는 형철이의 이름을 부르며 찾기 시작했다.
2층에 형철이가 없다고 확신한 세 명의 친구들은 1층으로 우르르 내려갔다. 형철이는 지훈이네 집 식탁 의자에 앉아 어딘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형철이의 시선을 따라 지훈이도 시선을 옮겼다.
“저거, 물에라도 타 먹어보면 안 될까?”
형철이가 말한 ‘저거’는 호랑이가 그려진 달달한 시리얼이었다. 형철이는 초등학교에서 두 번째로 싸움을 잘하는 아이였다. 늘 자신의 유일한 관심은 ‘학교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캡 - 싸움을 잘하는 친구를 그땐 그렇게 불렀다. - 으로 등극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언제나 강한 모습만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는데, 그날 형철이의 눈은 ‘상처’를 숨기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형철이의 눈빛은 사십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지훈이에게 선명하다. 그때 그 자리에 함께한 친구들의 얼굴은 기억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임에도.
하필 집에 우유가 없었다. 우유가 없어서 잠깐 고민을 했지만, 물에라도 타 먹어보고 싶다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형철이는 물에 탄 시리얼을 마시듯 먹었다. 친구에게 내어 줄 무엇인가가 집에 있어서 감사한 날이었다. 하지만 물에 탄 시리얼이 먹고 싶었던 형철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지훈이는 지금도 궁금하다. 집의 차이가 서로의 관계에 균열을 내지 않기만을 바랬다.
다행히 형철이는 그 이후로도 라일락 향내가 반기는 지훈이네 집을 자주 찾았다.
모르는 신발
서울에서 변두리 중의 변두리였던 지훈이의 동네에는 아파트가 없었다. 서민을 위한 다세대 주택과 단독 주택에서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이 살았다. 판잣집도 많았다. 다세대 주택은 4층을 넘지 않았고, 말이 단독 주택이지 집과 집 사이에 공간이 거의 없어서 옆집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무슨 이유로 싸우는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은 그런 집들이었다.
지훈이는 작은 2층짜리 집에서 초등학교 시절의 대부분과 중학교 시절 전반부를 보냈다.
신도 수가 100명이 될까 말까 한, 그것도 인근 대학교의 학생이 대부분인, 풍족하지 못한 교회의 목사였던 아버지는 교인을 위한 모임 공간이 더 필요했다. 느리지만 신도가 꾸준히 늘고 있던 탓이었다. 교회는 상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건물의 2층을 빌려 썼는데, 60~70명 정도의 사람이 앉으면 꽉 찬 느낌이 들 정도의 크기였다. 소모임까지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어서 지훈이네 집은 사실상 교회의 부속 건물 역할을 담당했다. 교회에 아낌없이 내 줄 용도로 아버지는 무리해서 아담한 2층짜리 주택을 마련하신 것이다. 그래도 그 덕분에 지훈이는 2층짜리 집에 사는 행운을 누렸고, 친구들은 부잣집 아들이라며 부러워했다. 친구들의 부러움은 철저히 오해에서 비롯되었지만, 철이 들기에 너무 이른 나이였던 지훈이는 그 시선을 즐겼다.
2층짜리 집으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신도들과 인근 지역 대학생들로 인해 지훈이만의 개인적인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토요일과 일요일이 절정이었다. 분명 자기 집인데, 있을 곳이 없었다.
주중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훈이는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버릇처럼 현관의 신발을 살폈다. 모르는 신발이 놓여있으면, 가방만 조용히 두고 다시 집을 나섰다. 모르는 신발의 주인들이 지훈이의 방까지 차지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친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온 날 아는 신발만 현관에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비로소 자기 집이 자기 것이 된 순간이니까.
라일락
손바닥만 한 마당에는 라일락 한 그루가 심겨 있었다. 이 집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라일락의 향기는 여전히 가슴에 새겨져 있다. 지훈이네 집을 찾는 모든 사람은 라일락 나무를 좋아했다. 중학생 지훈이는 이따금 라일락 나무에 기대어 습작을 했다. 시나 짧은 에세이를 끄적거렸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공책과 연필 한 자루를 들고 나무에 기댄 채 시상을 찾아 헤매던 지훈이는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저기요, 혹시 하숙 구하시나요?”
인근 대학의 학생으로 보이는 누나 두 명이 열어 준 대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물었다.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지훈이였지만, 친한 친구 집이 하숙을 운영했기에 ‘하숙’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자취 문화가 자리 잡아 하숙집이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당시에 대학 인근에는 학생들의 잘 곳뿐만 아니라 식사와 빨래까지 책임지는 하숙집이 흔했다. 학기 시작 전에는 좋은 하숙집을 구하기 위해 학생들의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되던 시절이다.
하숙을 운영하는 바로 옆집 담벼락에서는 하숙생 구한다는 벽보가 언제나 붙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지훈이네 집이 하숙을 운영한다고 생각한 대학생들이 가끔 집을 방문했다. 당연히 이날도 지훈이는 하숙을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아, 아쉽다. 이 집 라일락 향기 너무 좋은데…”
아쉬워하는 누나들이 발걸음을 돌리기 전에 무엇이라도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누나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선 빨리 집으로 들어가 오렌지 주스 두 잔을 들고나왔다. 발품 팔이에 지친 누나들은 환한 웃음으로 보답한 후 주스를 마시고 다른 하숙집을 찾아 나섰다.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아버지가 가족회의를 소집하셨다. 안건은 ‘이사’였다. 복잡한 생각이 속에서 뒤엉켰다. 개인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 이 집을 떠나 나만의 집에서 살 수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라일락 나무가 너무 보고 싶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사의 이유가 뜻밖이었다. 이 집을 헐고, 교회를 짓기로 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유를 듣게 된 것이다. ‘크지도 않은 집에 교회를 지어봤자 몇 명이나 들어올 수 있다고 이런 무모한 결정을 하신 것일까?’, 싶었다.
집을 비워주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지훈이네는 원래의 집으로부터 걸어서 15분 거리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했다. 지훈이의 중학교는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새로운 집에서 학교에 가려면 산 초입에 있는 원래의 집을 지나야 했다.
무덤덤하게 학교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지훈이는 그날 아침을 잊지 못한다. 교회를 짓기 위해 라일락 나무가 뽑히던 순간, 하필 그 시간에, 지훈이는 그 자리를 지나고 있었다. 몸이 굳었고, 마음도 굳었다.
집이란 무엇일까?
지훈(가명)씨는 오늘을 사는 평범한 40대 가장입니다. 지훈씨는 가난으로 힘든 사람이 많았던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작은 집이지만 친구를 부를 수 있는 ‘집’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지훈씨에게 집이란 나눌 것이 있어서 고마운 존재였고, 사람을 부를 수 있어서 감사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관계의 균열을 걱정해야 하는 공간이기도 했답니다. 여전히 라일락 향기가 잊히지 않는다는 지훈씨는 현실의 생업에서 자유로워지는 날 작은 마당이 있는 집에 라일락을 심고 살고 싶다고 합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각색을 허락해 주신 지훈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