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이네 집
다락행
초등학교 5학년 제인이는 다락으로 숨어들었다.
작은 제인이도 다락에서는 허리를 펴고 일어설 수 없었다. 바지를 앉아서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천장이 낮았기 때문이다. 돈벌레의 예고 없는 등장에 소스라칠 때면 늘 머리를 천장에 꽁하고 부딪혔다.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락의 돈벌레는 좀처럼 적응하기 힘들었다.
처음 제대로 둘러본 다락은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먼지는 그 자체보다 쿰쿰한 냄새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엎드려야 밖을 볼 수 있는 세모 모양의 창문 옆으로는 몇 달 혹은 몇 년을 익고 있는지 가늠하기 힘든 효소통과 안을 들여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종이 상자가 바위처럼 쌓여 있었다. 분명 새엄마는 꽤 자주 효소를 한 국자씩 퍼왔는데 뚜껑 위에 앉은 먼지를 걷어낼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일까. 제인이는 쌓인 먼지부터 걷어내야 했다. 다락과 화장실을 몇 번 오르내리며 걸레로 닦아 내니 그래도 먼지의 냄새가 많이 사라져 잠을 청할만했다. 이 다락에서 제인이는 초등학교의 마지막 2년과 중고등학교 6년, 그렇게 8년을 살았다.
제인이네 집은 연탄 아궁이가 있는 부엌을 중심으로 세 개의 방과 거실이 둘러싼 형태였다. 아빠는 엄마와 헤어진 후 제인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새엄마와 재혼했다. 새엄마는 언니와 오빠를 한 명씩 데리고 제인이네 집과 살림을 합쳤는데 새로운 언니는 제인이의 친언니보다 나이가 두 살 많았다. 풍채가 좋아서 모든 것을 품어줄 것 같은 새 큰 언니와 제법 귀여운 인상의 작은 오빠가 생겨 제인이는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큰 언니의 손은 매서웠고, 작은 오빠의 손은 징그러웠다. 상처가 켜켜이 쌓여 견딜 수 없게 되자 제인이는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방학을 앞두고 부엌 위의 다락으로 몸을 숨겼다.
원래 다락을 차지하고 싶었던 사람은 큰 언니였다. 특이하게도 다락에는 사다리나 계단이 없었다. 작은 상자를 받치고 폴짝 뛰어올라 한쪽 다리를 먼저 걸친 후 올라서야 하는데 뚱뚱한 큰 언니는 몇 번 시도하더니 다락 살이를 포기해 버렸다. 겉으로는 마음이 변했다고 했지만, 실상은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운동 신경이었다.
제인이는 아무에게도 허락을 구하지 않고 다락행을 결심했다. 큰 언니는 물론이거니와 덩치가 산만해 작은 다락을 오를 수 없었던 작은 오빠에게서도 벗어나야 했다. 다락에 오른 것은 이를테면 생존 본능이었다. 며칠 후 큰 언니와 욕설을 주고받던 작은 언니 그러니까 제인이의 친언니도 다락으로 올라와 화를 누르며 제인이의 옆에 누웠다.
88년 여름, 자매의 다락 동화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다락 동화
자매의 다락에는 공주가 살았다.
“언니, 이번에는 무슨 색 옷을 입혀 드릴까?” 공주님에게 새 옷을 만들어 드릴 참이다.
다락에는 엎드려야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낮은 창이 있었다. 다락에 누워 창문 밖을 구경하던 제인이는 길 건너편에 사는 영대 오빠와 종종 눈이 마주쳤다. 그때마다 영대 오빠는 뭐가 부끄러운지 시선을 돌리거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영대 오빠네 집은 동네에서 가장 잘 사는 집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지만 영대 오빠의 역할은 아쉽게도 동네 바보 형이었다. 제인이는 이 집을 영원히 떠날 때까지도 동네 사람들이 영대 오빠를 왜 바보라고 놀리는지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영대 오빠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다락의 창문으로 길을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던 제인이는 영대 오빠와 또 눈이 마주쳤다. 평소라면 집으로 조용히 사라졌을 테지만 이날 영대 오빠는 파란 비닐봉지에 무언가를 담아 제인이의 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창을 통해 건네받은 파란 비닐봉지 안에는 깡마른 공주 인형이 들어 있었다. 이날부터 제인이는 공주의 옷을 지어 입히는 시녀가 되었다. 한참을 지나 안 사실이지만 영대 오빠는 동생의 인형을 제인이에게 주었고, 그날 영대 오빠네 집은 사라진 인형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공주는 무조건 흰색 아니니?” 고등학교 3학년의 언니와 초등학교 6학년 제인이는 진지했다. 제인이도 이번에는 언니의 조언대로 흰색 드레스로 공주를 뽐내주기로 했다. 자신의 고집대로 지난번에는 빨간 드레스를 입혔더니 영 촌스러웠다. 옷감의 재료는 일곱 식구가 입다가 버린 옷이었다. 적지 않은 식구가 한 집에 모인 탓에 공주는 철마다 새로운 드레스로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옷을 버린 날이면 언니는 귀신같이 그 옷을 찾아와 제인에게 건넸다.
제인이에게 다락은 상상과 현실이 묘하게 중첩하는 공간이었다. 잠들기 전 빌려온 책을 언니가 읽어 주거나 이미 읽은 책의 이야기를 해줄 때면 상상과 현실의 경계가 더 희미해지곤 했다. 끝까지 읽어 준 적이 별로 없지만, 책에 등장하는 인물과 에피소드는 다락 안 제인이의 상상력을 더욱 풍부하게 했고 이는 다락의 삶을 견디도록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동생아, 저기 저 별 보이니?” 아직 밖은 환한데 언니가 갑자기 별이 보이냐고 물었다. “아니” 창문 밖을 보지도 않은 채 말을 되받은 제인이의 영혼 없는 대답이 못마땅했는지 언니는 제인이를 바닥으로 잡아끌어 다락의 창문 밖으로 하늘을 보도록 했다. 아주 희미한 별이 보였다.
“어머! 진짜 보이네, 별이.” 제인이의 말에 영혼이 실리기 시작했다.
“동생아, 저 별은 자기 빛이 너무 약해 부끄러워서 아무도 안 보는 초저녁에 잠시 떴다가 지는 별이래.” 제인이는 제목 없는 동화의 주인공이 된 듯 상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제인아. 잘 생각해봐. 저 별은 사실 빛이 가장 강한 별이야. 봐봐. 아직 태양이 지지도 않았는데, 저 별 혼자 떴잖아. 저 별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언니가 입을 열었다.
“언제쯤, 진짜 자신을 알 수 있을까?”
이제 막 사라지려는 초저녁의 별이 제인이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다락, 끝이 아닌
다락의 언니는 제인이의 유일한 보호자였다.
비가 심상치 않게 땅을 적셔가던 장마의 초입, 큰 언니가 출근을 위해 제인이의 분홍 우산을 집어 들었다. 거실에서 이 광경을 우연히 목격한 제인이의 친언니는 온몸의 힘을 배에 모아 외쳤다. “그거 제인이 우산이야! 제인이 학교 가야 하는데 뭐 쓰라고! 네꺼 써!” 제인이의 친언니는 두 살 더 많은 큰 언니에게 맞서는 유일한 존재였고, 집구석은 조용해야 한다며 침묵을 침묵으로 강요하던 아빠와 음악 한다며 연습실에서 먹고 자는 친오빠의 대체자였다. 제인이는 다락의 언니가 소머즈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집을 나갈 거야.”
가끔 다락의 언니는 진지하지 않은 말투로 집을 나갈 거라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어린 제인이는 이 말을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워낙 말투가 진지하지 않았을 뿐더러 정체를 숨기고 다락을 지키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던 소머즈가 집을 떠난다는 것은 6학년의 제인이가 상상할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언니는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친 바로 그날 다락에서 작은 짐을 챙겨 집을 나갔다. 너무 늦게 언니의 말이 진짜였음을 깨달은 제인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인이는 언니와 함께 길을 나섰다. 물론 현실의 동행은 아니었고, 상상 속 동행이었다.
‘지금은 언니가 마을 입구까지 갔겠다…
지금은 슈퍼 앞을 지나고 있겠네…
지금은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걸…
아마 지금은 버스를 탔을 거야…’
언니의 발걸음, 그 속도에 맞추어 동행했다. 이제 버스를 탄 언니를 보내야 한다. “잘 가, 언니.”
상상 속 언니는 너무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렇게 자매의 다락 동화는 끝이 났고, 제인이는 두 번째 딸을 낳은 뒤에야 언니를 다시 만났다.
집이란 무엇일까?
큰 언니의 손찌검과 작은 오빠의 추행에서 벗어나고자 다락으로 숨었던 제인씨(가명)와 이를 고통으로 지켜본 언니에게 집은 다리를 끊임없이 조여 오는 올무였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 중에도 다락은 자매를 품어 주었고, 그 안에서 둘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비록 언니가 집을 떠났을 때, 어린 제인이는 분명 너무 아프고 슬펐지만, 철이 든 제인씨는 그때의 언니가 제일 멋있었다고 합니다.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떠나기 전날 밤에 언니가 한 말은 중학생이 된 제인이의 삶을 지탱했다고 합니다. “동생아, 한번 더 때리거나 그러면 빗자루 들고 덤벼. 그래도 돼.”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각색을 허락해 주신 제인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