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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진 Oct 23. 2021

“편지함"

도현이와 태은이네 집

이 남자에게 벌어진 일


“저... 군가는... 빼시지 말 입니...”


일병으로 진급한 지 이제 막 두 주가 지난 도현이는, 강현철 상병에게 편지 앞부분의 군가는 빼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여전히 무서운 강현철 상병이었지만, 반쯤 쓴 편지를 검토해달라고 먼저 부탁했고, 일병으로 진급도 했기에 설마 때리겠냐 싶어 솔직한 생각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욕설과 함께 구겨진 편지지가 말을 채 끝맺지 못한 도현이의 머리로 날아왔다.


“이 새끼, 그걸 이제 말하냐?”


군대는 정말 적응하기 힘든 놀라운 곳이었다. 펜팔을 시도하는 편지의 첫 문장을 ‘겨레의 부름에 젊음을 바쳐 조국수호 다짐한 피 끓는 용사...’로 시작해도 그게 여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군대에서 처음 알았다. 군가를 맨 위에 적고 반 페이지나 더 쓴 후에 검토를 부탁했으면서도 ‘왜 그걸 이제 말하냐!’라며 욕설을 내 뱉는 고참에게 한 마디 대꾸할 수 없는 군대에서의 삶은 매일이 새로웠다.


어쩔 줄 몰라하던 도현이에게 강현철 상병은 모나미 153 볼펜과 꽃이 그려진 분홍색의 편지지를 툭 던지며, 한 마디 남기고 자리를 떴다. “차도현이, 네가 한번 써봐!”


도현이는 펜과 편지지를 집어 들며 생각했다. 답장이 오기 위해서는 편지지부터 바꿔야 한다고. 매점에서 조금 더 세련된 편지지를 사 올까 하다가 강현철 상병을 위해 돈을 쓰기는 싫었다. 그냥 분홍색 편지지에 대충 적어 내려갔다.


며칠 후 편지를 배달하는 병사가 도현이네 내무실 문을 열었다. “강현철 상병님, 편지 왔지 말입니다.”


그렇게 강현철 상병은 세 번의 펜팔 시도 끝에 첫 답장을 받았다. 강현철 상병과 편지 속 미지의 여인은 펜팔에 진심이었다. 덕분에 도현이는 거의 두 주에 한 번은 강현철이라는 이름으로 미지의 여인에게 편지를 부쳐야 했다.


2000년대 이전에는 ‘포켓 가요’라는 것이 유행했다. 포켓 가요는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악보집이었다. 정말 딱 손바닥만 했다. 포크송의 유행과 함께 기타(guitar) 치며 노래하는 것이 매력적인 남자의 필수 요소였던 시대였기에 포켓 가요는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포켓 가요의 맨 뒤편에는 펜팔을 원하는 사람의 주소 목록이 있었다. 펜팔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요즘 표현으로 썸을 타는, 이성을 만나는 방식 중 하나였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악보보다 펜팔 주소를 얻고자 포켓 가요를 사기도 했다.


강현철 상병이 세 번의 시도 만에 포켓 가요에서 얻은 주소를 통해 펜팔에 성공했다는 소문은 부대 안에 금방 퍼졌다. 물론 편지를 도현이가 썼다는 사실도 함께.


생방송 음악캠프에서 ‘내 남자 친구에게’를 부르는 핑클에게 빠져들어가던 도현이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차도현이... 잠깐 나와봐.” 전역이 불과 4개월 남은 박희만 병장이 도현이를 내무실 밖으로 불러냈다. 그의 손에는 포켓 가요가 들려 있었다. 주소 목록을 살피던 박희만 병장은 군포가 없다며 투덜거렸다. 그때 도현이의 눈에 안양시 주소가 들어왔다. “안양시가 군포시랑 가깝지 말입니다.” 정확히 십분 후 도현이는 박희만 병장 이름으로 안양시에 사는 미지의 여인을 향해 펜을 들었다.


아쉽게도 답장은 오지 않았고, 박희만 병장은 전역했다.


그런데 군대는 역시 놀라운 곳이었다. 오지 않던 답장은 도현이가 상병으로 진급하고도 한 참 후인 십 개월 만에 부대에 도착했다. 고참들의 편지를 대필해줬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여전히 회자되고 있어서 편지는 곧장 도현이에게 전달되었다.


도현이는 편지를 뜯고 한자 한자 읽어 내려갔다.


그 여자에게 벌어진 일


“엄마가 돌아오란다. 그냥 집에서 준비하라고...”


적잖이 타지에서 방황하던 친구였기에 자기보다 먼저 이곳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날이 올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집에 하나뿐인 방을 친구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양보했을 뿐만 아니라, 안양에서 새롭게 사귄 지인들을 불러 모아 술잔치를 벌려놓고 치우는 것에는 1도 도움을 안 줘도 참아준 이유는 태은이에게 이 친구는 너무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태은이는 어린이집 교사 자리를 구해 고향인 대구를 떠나 안양에 자리를 잡았고, 베프를 자처한 친구는 태은이를 혼자 보낼 수 없다며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안양으로 함께 향했다. 친구는 부모님에게 태은이네 집에서 지내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말했지만, 태은이는 친구가 ‘행정법’이나 ‘행정학개론’같은 책을 펴거나 학원 수강을 위해 집을 나선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동네 친구들 중 유일하게 경상북도에서 가장 좋은 국립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태은이는 이 친구가 너무 부러웠다. 집안 환경, 외모, 학벌, 성격 등 어느 것도 전혀 모자름이 없었다. 하지만 돌아오라는 엄마의 호출에 풀이 죽어 가방을 싸고 있는 친구는 안양에선 매일 술로 지냈다.


“나 가면, 너 어쩌냐...”


친구가 힘없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무심코 들었다면 영혼이 없다고 타박할 수 있는 말투였지만, 태은이는 친구의 이 걱정이 빈말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태은이는 과호흡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폐렴이나 천식 같은 질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과호흡으로 인해 이미 두 차례의 실신을 경험했고, 두 번 모두 지금 옆에 있는 친구가 곁을 지켰다. 안양 생활을 시작해서도 과호흡이 태은이를 때때로 두려움에 떨게 했는데, 그때마다 친구가 옆에서 함께 호흡하며 진정시켜 줬고, 태은이를 안고 토닥이면 태은이는 정상 호흡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친구는 지인들과 집에서 술을 마실 때에도 태은이의 호흡과 표정을 살필 정도였으니, ‘나 가면, 너 어쩌냐...’는 친구의 걱정은 빈말일 리 없었다.


과호흡은 입시 실패와 함께 찾아왔다. 적어도 대구에서 괜찮은 사립대학의 유아교육과는 갈 수 있을 줄 알았고, 자기가 유치원 선생님이 될 거라는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원한 모든 유아교육과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받아 들었다. 곧장 부모님은 ‘재수 지원 불가’를 선언했다.


대구로 돌아간 친구는 편지를 보내주기로 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공중전화와 집 전화로 오랜 시간 통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편지는 매우 중요한 소통의 수단이었다.


친구가 대구로 떠난 지 한 달 만에 과호흡이 다시 찾아왔다. 친구가 옆에 있다고 상상하며 함께 호흡해보라는 톤 높은 경상도 말투를 머릿속으로 생각해 내기 위해 애썼다. 그 호흡 그대로 박자 맞추듯 숨을 쉬어가던 태은이는 친구 없는 첫 과호흡을 큰 일 없이 넘겼다.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혹시, 편지....?’


태은이는 편지함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4층짜리 빌라에는 층마다 두 집이 있었고, 편지함은 층별로 공동으로 사용했다. 태은이가 사는 4층 편지함에는 옆집에게 온 세금 고지서 같은 것이 꽂혀 있었다. 태은이는 손을 편지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몇 개의 편지가 손에 잡혔다. 일단 모두 꺼내 확인해보니, 친구에게 온 편지가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분명 402호, 자기 집으로 온 편지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받는 이: 이지희’로 되어 있었다. 보낸 사람은 박희만이었고, 군인으로 보였다.


‘남자 친구인가?’ 속으로 생각하며 편지를 다시 편지함으로 떨구고 친구의 편지만 손에 든 채 4층으로 향했다. 마침 빌라의 주인아주머니를 2층 계단에서 마주쳤다.


“아줌마, 혹시 우리 집 전에 살던 분 이름이 이지희에요?” 아주머니는 이지희라는 사람이 402호에 살다가 결혼해서 빌라를 떠났다고 알려주었다. 신랑 따라 천안인가, 태안인가로 갔다며.


태은이는 이 편지의 주인공이 지금의 신랑이거나 아니면 전 남자 친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일이라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다는 마음에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다. 호기심이 발동한 태은이는 다시 편지함으로 내려가 편지를 들고 올라왔다.


군대에서 샀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감각적인 편지지에 꾹꾹 눌러쓴 글씨가 흡사 여자가 쓴 것처럼 고왔다. 익히 들어본 적 있는 원태연의 시로 시작한 편지는 곳곳에 감성이 스며들어 있었다. 여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고 펜팔을 청하는 편지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편지의 주인공이 궁금해졌다. 태은이는 부대로 편지를 부쳤다. 곧 박희만이 아닌 차도현이라는 이름으로 답장이 왔고, 얼마 후 병장이 된 차도현과 몇 번의 편지를 더 주고받았다. 차도현은 담백한 문체로 태은이의 ‘지금’을 위로했다.  


네 번째 받은 편지에서 차도현이라는 남자가 만나고 싶다고 했다. 춘천이 집이라는 사람이 곧 말년 휴가라며 안양까지 오겠다고.


지금은 없어진 안양의 본 백화점 앞, 저 멀리 차도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태은이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호흡이 가빠옴을 느꼈다.


집이란 무엇일까?
도현씨(가명)와 태은씨(가명)는 지금 한 집에 사는 18년 차 부부입니다. 태은씨의 과호흡은 친구의 자리를 대신한 도현씨의 도움으로 안정되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많은 ‘사건’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편지 대필부터 친구의 부재까지...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 사건 중 어느 하나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 중 일부는 당시에는 충분히 불행으로 느껴질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불행한 사건의 마지막이 결국은 행복일 수도 있음을 두 사람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각색을 허락해주신 도현씨와 태은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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