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혁이네 집
삼 형제
가장 큰 형 이름은 랄프, 둘째는 쎄스 그리고 막내는 다니엘, 이들 삼 형제와 무탈하게 1년을 보내야 할 과제가 생겼다.
5학년의 찬혁이는 아빠 회사에서 제공한 가족 기숙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여기는 한국이 아닌 미국.
유명하기는 한 것 같은데 정작 아빠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올 때만 해도 필라델피아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잘 몰랐다. 미국이라는 곳은 워낙 넓어서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가는 데만도 비행기로 수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제주도 가는 비행기조차 타 보는 연습을 해본 적 없는 찬혁이의 첫 비행은 19시간 걸렸다. 기내 화면에 표시되는 비행기 아이콘이 미국 본토에 진입해서 까지도 끝 없이 공중에 붙잡혀 있자니 좀이쑤셔 견디기 힘들었다. 일 년 후에나 19시간 걸리는 비행을 한다는 점에 그나마 안도할 지경이었다.
아빠는 회사의 지사를 설립을 돕는 역할을 하기 위해 미국 필라델피아로 연수겸 건너왔다. 아파트라고 불러야 할지, 빌라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회사에서 마련해 준 기숙사는 복층 구조로 되어 있었고, 찬혁이 네 집이 아래층에, 랄프 네 삼 형제 집이 위층에 자리했다. 실내에서도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이 있긴 했는데, 위층에서 출입문을 잠가 놓은 바람에 계단을 통한 위층 출입은 불가능했다. 랄프 네가 잠갔는지 그 전에부터 잠겨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찬혁이가 미국으로 건너온 해 랄프는 12학년 그러니까 우리로 따지면 고3이었고, 쎄스는 랄프보다 두 살 어렸으니 고1, 다니엘은 형들보다 조금 차이 나게 어린 6학년이었다. 찬혁이는 다니엘이 또래이니 만큼 금방 친해질 수 있겠다 생각했고, 랄프와 쎄스는 가까이 하긴 좀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나이 차이도 차이지만 다 자란 미국인의 외향에서 오는 포스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마주칠까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찬혁이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집 앞에서 거의 매일 마주친 랄프는 무엇이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이것저것 물어봤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자신을 찾아 달라고 하루도 빼지 않고 당부했다. 빈말인지 진심인지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언제나 친절하게 말해주니 든든한 형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쁘지 않았다. 쎄스는 랄프 같은 다정함은 없었다. 하지만 나이 차이가 꽤 있음에도 찬혁이와 늘 놀고 싶어 했다. 주말마다 이벤트를 만들어 같이 놀자고 조르는 모습이 마치 또래나 심지어 동생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덕분에 찬혁이는 주말마다 쎄스와 질리도록 놀았다.
반면에 다니엘은 어딘가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형들과 함께하는 놀이에서는 나름 적극적이고 괜찮은, 때로는 오버까지 하는 녀석이었지만, 찬혁이와 둘이 마주칠 때면 인사도 없이 지나가거나 심지어 시비조의 말을 건네기까지 했다.
"너네 나라 애들은 정말 모두 태권도 잘해? 그럼 너 나 이겨? 난 미래 WWF(미국 프로레슬링 협회, 지금은 WWE) 챔피언인데?" 툭하면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었는데, 찬혁이는 왜 다니엘이 자기에게 이러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여하튼 위층의 삼 형제와 함께하는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열린 문
찬혁이는 아빠와 함께 인근의 초등학교로 전학 수속을 밟았다. 찬혁이네 반은 20명 조금 넘는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반의 가장 큰 특징은 한국 학생들이 찬혁이를 제외하고도 다섯 명이나 된다는 점이었다. 학교의 방침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찬혁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 다섯 명 중에 한국 말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학생은 없었어도, 그들 존재 자체가 적응에 큰 힘이 되었다. 어색한 한국말로 첫인사를 건네 던 몇몇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대부분 이민 가정 2세였다.
찬혁이는 비록 반에 배정이 되긴 했어도 주로 ESL 클래스에서 영어를 배우며 학교 생활을 하기로 했다. 학교에 도착한 후, 그리고 집으로 가기 직전에 배정된 반에 잠시 들리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ESL 클래스에서 보냈다. 같은 반의 학생들과 친밀감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은 운동회나 학예회 같은 활동 때뿐이라 이 점이 조금 아쉬웠다.
반에는 사물함이 있었다. 사실 ESL 클래스가 운영되는 교실에도 사물함이 있어서 반에 있는 사물함을 굳이 사용할 일은 없었다. 2월 중순 즈음, 담임 선생님의 몇 말씀을 듣고 ESL 클래스로 향하려는 데 조앤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2세 학생이 찬혁이의 팔을 붙잡고 말을 걸었다.
"내일부터 사물함 좀 열어 놓을래? 꼭 그렇게 해야 돼."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진지했다. 마치 이 말에 따르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것처럼.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 턱이 없었지만, 이유를 물으면 영어로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찬혁이는 오케이만 연발하고 ESL 클래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찬혁이는 처음으로 사물함을 잠글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오후 ESL 클래스를 마치고 반으로 돌아와서 사물함을 확인해 보니, 사물함 안쪽에 열쇠가 있었다. 사물함에 굳이 넣을 것이 없었기에 잠글 일도 없었고, 열쇠를 찾아볼 생각도 안 한 것이다. 때문에 조앤의 부탁은 찬혁이의 특별한 행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이 되어 버렸다.
주말을 보내고 학교에 온 찬혁이는 사물함을 가득 채운 초콜릿에 너무 기뻐 실신할 지경이었다. 밸런타인데이였던 것이다. 이제 막 미국으로 건너온 동양인을 환대하기 위함이었는지, 정말 좋아서 준 것인지 모르지만, 나름 큰 사물함이 초콜릿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방에 가득 초콜릿을 욱여넣고 봉지를 하나 얻어 거기에도 가득 담은 채로 스쿨버스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기숙사 앞마당에 도착하자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다니엘의 삐딱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은 이것들을 어떻게 먹을지만 고민이 되었기에 개의치 않고 집으로 들어와 식탁 위에 가져온 것들을 쏟아부었다. 하루에 하나씩 먹더라도 거의 한 달은 먹을 수 있는 엄청 난 양이었다. 모든 초콜릿에는 보낸 학생들이 붙여 놓은 메모가 있었는데 이름과 함께 환영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우선 가장 괜찮아 보이는 것 하나를 뜯어 입에 넣었다. 1년 동안 미국에서의 삶이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너무 좋았다. 다섯 시 정도가 되자 학교에서 돌아온 쎄스가 찾아왔다. 돌아오는 주말에 어떻게 놀지를 이야기하고 싶어서란다. 바로 어제도 발야구하면서 놀았는데, 정말 놀이에는 진심인 형아였다. 집 밖에서 산책하며 이야기하자기에 나갔더니 랄프 형도 있었다. 랄프는 고3의 나이였지만 이미 차를 몰고 다녔다. 랄프의 제안에 쎄스와 찬혁이는 차를 타고 인근 KFC로 저녁을 먹기 위해 향했다. 다니엘이 동행하지 않아 이상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8시 정도에 집에 들어왔다. 아빠는 퇴근하셔서 집에 계셨고, 메모를 남기고 랄프랑 저녁을 먹으러 나갔던 터라 큰 걱정 하지 않으신 채 식탁 위의 초콜릿의 출처만 궁금해하셨다.
"반 애들이 줬어. 아마 학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환영한다고 모든 애들이 준 거 같아. 그래서 내 것이 제일 많더라고."
'제일 많더라고'에 힘을 주며 식탁 위의 초콜릿을 가리키려는데, 어라? 조금 이상했다. 초콜릿의 양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보였다. 반까지는 아니지만 삼분의 일 정도가 사라진 상황에 찬혁이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빠에게 혹시 치웠냐고 물었다. 당연히 아빠는 손을 댄 적이 없다면서 착각한 것 아니겠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듯 했다.
'어, 이상한데.' 속으로 생각하며 우선 조앤이 준 초콜릿부터 찾기 시작했다. 랄프랑 쎄스랑 밥을 먹으러 가기 전에 조앤이 준 초콜릿은 따로 빼놓았다. 초콜릿이 특별히 좋아 보여 서라기보다는 조앤이 예뻐서였다. 조앤이 준 초콜릿도 사라지고 없었다.
찬혁이는 방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초콜릿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잠시 거실 바닥을 살펴보자 또 다른 하나가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하나가 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 하나는 거실에서 랄프 네 집으로 오르는 계단 위에서 발견되었다. 찬혁이는 계단 중간 정도에 떨어져 있던 초콜릿을 주웠다. 그리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평소 닫혀있던, 아래층에서 위층을 연결하는 계단을 오르면 나오는 문을 살짝 열어봤다.
문이 열렸다. 평소에는 언제나 닫혀 있던 문이었다. 세 개의 초콜릿이 떨어진 위치로 보는 범인의 동선, 열린 문, 당일 알리바이 등을 생각해보면, 범인의 정체는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다.
닫힌 문
찬혁이는 당장 아빠에게 위층 랄프 네 부모님에게 따져 달라고 졸랐다. 초콜릿을 훔쳐 먹었다는 것보다 그 많은 초콜릿 중에 조앤 것이 포함되었다는 것이 더 화가 났다. 아빠는 정말 다니엘 짓인지 확인이 필요하다면서 조심스러워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빠의 미지근한 반응에 찬혁이는 분노의 감정을 섞어 나라 잃은 것처럼 울고 또 울었다. 적어도 조앤이 준 것은 찾아야 했다.
어쩔 수 없었던 아빠는 비록 실내 계단 위의 문이 열려 있음에도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랄프 네로 향했다. 일이십 분 지났을까, 아빠는 없어졌던 초콜릿 일부를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찬혁이는 몇 개 남지 않은 초콜릿 사이에서 조앤이 준 것을 찾으려 했으나 없었다. 다니엘이 미치도록 싫었다.
밤 아홉 시가 지나자 위층에서는 때리는 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국 부모도 아이를 때리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잠깐 미안해지기도 했지만, 찬혁이의 분이 풀리기에는 부족했다.
랄프 네와 찬혁이 네를 실내에서 연결하던 문은 다시 잠겼다.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향하고 있었다. 기숙사는 마당이 넓었고, 주변 마을도 한적한 편이어서 자전거를 타기에는 좋은 환경이었다. 아빠는 찬혁이가 동네에 어느 정도 적응하자 자전거를 사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동네가 익숙해져 길을 잃지 않을 즈음에 사준 것 같다. 툭하면 다니엘은 찬혁이의 자전거를 몰래 타고 사라졌다. 물론 때가 되면 가져다 놓기는 했지만, 찬혁이는 너무 짜증이 났다. 찬혁이는 자전거를 타지 않을 때도 자전거가 제 자리에 있나 늘 살폈고, 현장에서 다니엘이 자전거를 타려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애썼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찬혁이는 큰 소리로 자신의 자전거 의자에 막 엉덩이를 내려놓던 다니엘을 불러 세웠다. 그런데 다니엘은 자전거를 놓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아예 사라져 버렸다. 죽으라고 소리치며 달려갔지만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날 밤, 또 한 번 위층에서는 때리는 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을이 절정으로 향하자 쎄스가 주말 낚시를 계획했다. 낚시를 위해서는 지렁이를 먼저 잡아야 한다며, 기숙사 근처 숲에 지렁이가 많이 있을만한 곳에 함께 가자고 했다. 안 따라나설 이유가 없었다. 다니엘도 간다기에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그래도 이미 낚시의 즐거움을 알고 있었다. 다니엘이 친한척 하며 누가 많이 잡는지 내기를 하자기에 응했고 찬혁이는 완패했다. 다니엘에 져서 열은 좀 받았어도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낚시를 하러 호수로 이동하기 위해 랄프의 차에 올라탔다. 쎄스는 이미 앞 조수석에 자리하고 있었고 찬혁이는 뒷자리에 먼저 탄 채로 다니엘을 기다렸다. 마르고 키가 큰 랄프, 쎄스와는 달리 다니엘은 크지 않고 뚱뚱했다. 낚시 도구가 찬혁이 옆자리에 있어서 뚱뚱한 다니엘과 같이 앉기 조금 불편하겠다 싶었는데, 다니엘을 태우지 않고 차가 출발하는 것 아닌가.
찬혁이가 물었다. "랄프, 다니엘은 같이 안 가?"
"응, 찬. 같이 안 갈 거야." 랄프가 답했다.
당연히 이유가 궁금했다. 지렁이까지 같이 잡은 다니엘이 안 가니 이상해서 랄프에게 물었다. 이에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한 랄프 대신 쎄스가 입을 열었다. 평소의 쎄스의 말투와는 달리 목소리에 장난기가 빠져있었다.
"오늘 자기 아빠를 보러 가는 날이거든. 1박 2일 면회라 아마 아빠랑 같이 잘 거야."
찬혁이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랄프의 아빠와 다니엘의 아빠가 다른 사람이고, 다니엘은 자기들의 형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지금 쎄스가 하고 있는 중이다.
"다니엘이 우리랑 조금 다르게 생기지 않았어? 다니엘은 사촌 동생이야."라며, 쎄스는 다니엘의 아빠가 교도소에 수감 중이어서 삼촌인 자기 아빠가 어려서부터 데려다 키운 것이라 했다.
찬혁이는 낚시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집이란 무엇일까?
찬혁(가명)씨는 가끔 랄프(가명)와 쎄스(가명)가 생각 나는데, 다니엘(가명)이 더 보고 싶답니다. 지금 쯤이면 과연 다니엘은 친아빠와 함께 살고 있을까요? 찬혁씨는 궁금해했습니다.
결핍이 상당했을 것 같습니다. 아빠의 존재를 아예 모르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죄를 지은 친아빠의 존재를 알고 있던 다니엘은 삼촌의 집에서 크면서, 아이이기에 떼를 쓰면 얻을 수 있는 당연한 것들을 포기하며 살았을 겁니다.
초콜릿과 자전거 같은 것들 말이지요.
찬혁씨는 인터뷰 말미에 몇 번을 되뇌었습니다. "도대체 초콜릿과 자전거가 뭐라고...."
진짜 열어야 했던 것은 찬혁씨의 마음이었겠지만, 그때는 모두 다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각색을 허락해주신 찬혁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