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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진 Oct 24. 2021

“할머니의 서랍장"

채린이네 집

김치찌개


"꺅!"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돼지고기 덩어리를 빨간 국물 속에서 한참 동안 찾아 헤매던 채린이는 젓가락 끝에 무언가 묵직한 감촉을 느끼자 고기임을 직감하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꺼내 밥그릇으로 재빨리 던져 넣었다. 그런데 거의 동시에 할머니는 딱 하나 남은 것으로 추정되는 그 고기 덩어리를 채린이의 밥그릇에서 꺼내 동생 성준이에게 줬다. "근디 채린이 넌 꽉뚜기 좋아하지 않냐~!"


군내 나는 깍두기로 끓인 김치찌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당연히 돼지고기를 더 좋아한다. 마지막 돼지고기 한 덩어리가 성준이에게 넘어가자 채린이는 밥 한 숟가락을 남겨 놓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서울말과 반쯤 섞인 할머니의 전라도 사투리가 오늘따라 더 듣기 싫었다.


채린이네 집은 아빠, 엄마, 동생 그리고 할머니까지 다섯 식구가 모여 살았다. 아빠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며 사장님 소리를 들었는데, 채린이는 고등학교 올라갈 때까지 정확히 아빠가 무슨 공장을 운영하는지 알지 못했다. 엄마는 채린이가 중학교 때까지 아빠 일을 돕다가 아빠 사업체가 자리를 잡자 정말 엉뚱하게도 - 고등학생인 채린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 목사가 된다며 신학교에 입학했다. 아빠는 일 때문에, 엄마는 늦게 시작한 공부 때문에 집에서 같이 밥 먹을 일조차 많지 않았다. 집은 할머니가 책임지다시피 했다.


아빠는 금형 제작업체를 운영하면서 대기업 납품을 주로 했다. 일이 험했지만 아빠의 고생 덕분에 집의 사정은 비교적 넉넉했다. 서울 강북의 2층짜리 집에서 다섯 가족은 그럭저럭 부족함 없이 살았다. 1층에는 안방과 부엌 그리고 채린이 방이 있었고, 2층에는 동생 성준이 방과 할머니 방 가끔 아빠나 엄마 지인이 자는 빈방이 하나 있었다.


아빠는 팔 남매 중 넷째, 남자 형제 중 셋째였는데 아빠와 할머니의 나이 차이는 열여섯 살에 불과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세 번째 아내였다고 한다. 첫 번째 할머니가 여덟 남매 중 반, 두 번째 할머니가 나머지 반을 낳았고, 지금 할머니는 자녀 없이 할아버지와 단 이년을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의 장례 마지막 날, 할머니는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 이제부터 규영이랑 살란다."


이 한 마디에 규영이란 이름을 가진 채린이의 아빠는 열여섯 살 많은 할머니를 모시기 시작했다. 고1 때 처음 이 이야기를 들은 채린이는 이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아빠 위로는 형님이 둘이나 더 있었고, 아빠와 할머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빨간 콩나물국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있었다. 까만 얼굴이 시골에서 막 상경했음을 유추하게 만들었다. 영숙이란 이름의 이제 갓 스물이 된 언니였다.


영숙이는 가난한 시골 집을 떠나 서울에서 돈을 벌기 위해 가정부 일을 구하고 있었고, 아빠 지인의 부탁으로 집에 들이게 된 것이다. 세간 살림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빠, 엄마 모두 집에선 아침 식사 정도만 함께 하기에 할머니 혼자면 집안 살림을 넉넉히 꾸려갈 수 있었다. 할머니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집으로 들어온 영숙이에게 싫은 소리 할 '거리'를 찾느라 매분 매초 바쁜 것처럼 보였다.


부쩍 추워진 어느 가을날 아침, 채린이는 감기 기운이 돌았다.


"흰 죽 끓여줄까?" 영숙이가 쉬 일어나지 못하는 채린이의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언니 그보다... 혹시 콩나물 있으면 콩나물 국에 고춧가루 넣고.. 맵게 끓여줘." 채린이는 어디선가 감기에는 고춧가루 팍팍 넣은 콩나물국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 듯싶었다. 영숙이가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채린이와 영숙이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영숙이의 살가운 성격이 집에서 챙겨주는 사람 없는 채린이의 마음을 많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채린이의 먹고 싶은 것’을 해 주기 위해 노력했고, 채린이는 그런 영숙이가 늘 고마웠다.


채린이를 위해 준비된 빨간 콩나물국은 자연스레 식구의 아침상에도 올랐다. 아빠는 바쁜 듯 식탁을 한 번 들여다 보곤 빨리 나가야 한다며 신을 신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직 자고 있었다. 아빠가 나가자마자 갑자기 할머니가 성준이가 식탁에 앉기를 부엌에서 기다리던 영숙이에게 달려 가 영숙이의 등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누가 콩나물국에 고춧가루 넣으래! 성준이는 짭고 맵게 못먹는디!" 할머니는 채린이 아빠가 밥을 안 먹고 집을 나선 것도 빨간 콩나물국이 보기 싫어서라며 영숙이를 몰아세웠다. 정작 채린이네 집에서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는 아빠의 뒷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막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방에서 나온 채린이는 이 광경을 목격했고, 서서히 오르던 열이 삽시간에 온몸으로 확 퍼지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의 서랍장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할머니의 손찌검에 영숙이는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영숙이의 귀향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영숙이는 차마 채린이에게 집을 떠난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할머니에게만 말하고 집을 나와 터미널로 향했다. 성준이에 의하면, 할머니는 잡는 시늉도 안 했다고 한다.  


영숙이가 떠난 날 초저녁, 채린이네 전화벨이 울렸다. "성준이니?... 혹시... 채린이 있어? 나 채린이가 너무 보고 싶어..." 버스를 타기 전 영숙이의 마지막 전화였다. 하필 채린이는 영숙이가 집을 떠났다는 것도 모른 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 열 시가 다 되어서야 영숙이가 집을 나간 이야기를 성준이에게 들었다. 영숙이와 채린이는 그 후로 만나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 년 간 사귄 남자 친구와 함께 이제 새롭게 가족이 될 예비 시부모에게 인사하러 가던 길에 채린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할머니 돌아가셨다." 아빠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전해졌다.


할머니는 일 년 전 즈음에 대장암이 발병한 상태였는데, 수술을 포기했다. 수술 자체는 불가능하지 않았지만, 수술하지 않아도 고령이라 암세포의 성장 속도가 늦을 것으로 보여 최소 5년에서 길게 잡으면 10년은 되어야 치명적이 될 거라는 의사의 진단에 할머니가 수술을 한사코 거부하셨다. 수술 후 몸이 약화되는 거나 암세포로 약화되는 거나 그게 그거일 거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진단 1년도 되지 않아 암세포는 빠르게 몸을 잠식해갔고, 할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쇼크로 정신이 사라지기 전 가족에게 유서를 남겼다. 채린이 아빠에게는 고마움 한 줄, 엄마에게는 미안함 한 줄, 성준이에게는 그리움 한 줄, 그리고 채린이에게는 따로 남겨 놓았다며, 할머니 방 네 번째 마지막 서랍장을 열어 보라고 적혀 있었다.


염을 마쳤음에도 할머니의 얼굴은 고통으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돌아가신 후에야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의 방문을 열었다. 노인 냄새가 너무 싫어 거의 출입하지 않았었는데, 이젠 냄새가 많이 희미해져 있었다. 네 번째 서랍장을 열었다. 하얀 봉투가 보였다. ‘축 결혼, 할미가’라고 적힌 봉투에는 빳빳한 만원 짜리 열 개가 들어있었다.


채린이는 할머니의 봉투를 자신의 결혼식 축의금 함에 직접 넣었다.


집이란 무엇일까?
채린씨(가명)의 할머니는 열여덟의 나이에, 이미 두 번이나 부인과 사별한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오셨었죠. 그 시절 '식구가 많은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난 것은 '한'을 예약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나 영숙씨(가명)나 비슷했을 겁니다.

할머니는 아마도 가족으로 등록조차 안 된 집에서 문서상 '동거인'으로 살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엌을 지키는 것과 손자를 잘 돌보는 것으로 설정하신 듯하다고 채린씨는 추측했습니다. 그것을 못하면 언제 쫓겨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신 듯 하답니다.

할머니의 축의금은 채린씨의 마음을 완전히 녹이기에 부족해 보였습니다만, 그것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각색을 허락해주신 채린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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