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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진 Aug 04. 2018

도시, 살다 7화 - 대전 옛 충남도청사

권위를 벗고 문화를 입다

시청 앞은 괜찮아


내가 공부를 위해 5년간 생활한 미국의 도시는 안전하지 못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주요 5대 범죄가 census track 단위에서 통계가 생성되는 유일한 도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행정경계로 따지면 census track은 매우 작은 단위에 불과한데 여기 안에서 범죄 통계가 잡힌다는 말은 그만큼 범죄의 발생 빈도가 높다는 뜻일 거다.  


사실 대도시의 다운타운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밤에는 안 나가는 것이 좋다.


사이먼스 교수님이 언젠가 이런 농담을 하신 적이 있다.


"유진, 왜 우리 학교에서 도시학과가 발전했는지 아니?"


"네? 당연히 모르죠."


"학교가 있는 이 도시가 엉망이라 연구할 것이 많거든. 사람이 아프면 의사들도 바빠지잖아? 도시가 아프니 학자들이 바빠지지. 그래서 발전한 거야."


비록 농담이셨지만 나름 설득력 있게 들렸다.


교수님과 어댑티브 리유즈와 브라운필드 등에 관한 연구를 한창 수행하던 중 버지니아 공과대학에서 한국인에 의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사이먼스 교수님은 한국인인 내가 신경 쓰이셨던 것 같다. 연구실로 나를 부르셨다. 사실 한국 학생들끼리 그 사건 이후 자주 모여 나름의 걱정을 나누었는데, 언어는 달랐어도 사이먼스 교수님도 한국 학생들의 동요를 느끼셨던 것 같다. 그렇게 실제로 말씀하셨었고.


"이건 그 녀석(총기 난사범)의 문제이지, 한국인이나 한국의 문제는 아니야. 걱정할 것 없어. 네 친구들(한국 학생들)에게 그렇게 말해주렴. 보통의 미국인은 총기 난사 자체에 분노하지 난사범이 가진 피부색에 분노하지는 않는단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덧 붙이셨다.


"이 사건은 오히려 미국과 미국인의 문제란다. 어딜 가나 위험하지. 학교도 크게 다르지 않고. 특히나 밤에는 말이야. 그런데 다운타운에서 그나마 밤에 안전한 곳이 있단다. 시청 앞은 괜찮아. 나름"


클리블랜드 퍼블릭 스퀘어(Public Square)


클리블랜드(Cleveland)는 이 도시를 개척한 장군이자 서부 개척시대 (미국 입장에서) 영웅 중 한 사람인 Moses Cleaveland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 독자들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겠지만 나도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에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이 바로 왜 Cleaveland가 Cleveland로 변했는지이다. 몇 가지 설이 존재한단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이 도시의 첫 신문사가 이 도시의 건설을 선포하면서 신문에 사용하기에는 Cleaveland가 철자가 좀 길고 어울리지 않아 Cleveland로 표기한 것이 이 도시 이름이 이렇게 굳어진 계기라는 가설이다. 사이먼스 교수님도 그렇고 이 가설을 가장 유력하게 믿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건대 신문 헤드라인으로 뽑기에 Cleaveland가 어울리지 않다니 좀 이상하다. 어쩌면 단순히 오타였을 수도. 실제 오타 가설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신문사의 오타가 도시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


클리블랜드 장군(General Cleaveland)이 이를 테면 도시의 시조인 것인데 시조라 부르기에는 뭔가 좀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알에서 태어난다던가 따위의 신화까지는 아니더라도. 클리블랜드 장군은 코네티컷에서 태어나 거기서 죽었다. 개발 초기 코네티컷의 정착 지원자를 데리고 정착만 시켜 주고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삶을 마감했으니까 부족하다.


클리블랜드 장군은 코네티컷에서 배로 이리 호수(Lake Erie,  5대 호 중 하나)를 건너 어디 개척할 땅 없나 여기저기 탐사하던 중 지금의 클리블랜드에 도착한 모양이다. 지리적으로 클리블랜드는 이리 호수를 끼고 있고 쿠야호가 강(Cuyahoga River)이 지역을 가로지르며 흘러 물류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충분해 보였을 것이다. 또 멋들어진 산 - 지금의 쿠야호가 밸리 국립공원 - 도 충분해 관광지로의 가능성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초기 정착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클리블랜드 장군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개척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초기 정착만 지원하고 이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만 보아도 생각보다 인디언과의 갈등이나 초기 건설의 재정 문제가 도시 건설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고민을 했었을 수도 있다.


하여튼 클리블랜드 장군은 생각보다 일찍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리블랜드 퍼블릭 스퀘어에는 이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클리블랜드 시민은 이 동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시작조차 없었다면 자신들의 삶의 터전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 그 시작에 감사하고 클리블랜드라는 브랜드가 갖가지 아픔과 역경에도 지금까지 이어져 온 그 역사에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그래도 한 때 돈이 되는 도시가 클리블랜드였다. 급격한 인구의 감소로 심각한 재정 위기에 놓여있었는데 지금은 도시의 회복(restoration)을 위해 도시와 시민 모두 노력하고 있다.


클리블랜드 퍼블릭 스퀘어는 도시의 시작과 역사를 알림과 동시에 점심시간에는 도시에서 일하는 많은 직장인에게 식사와 쉼의 장소를 제공하고 주말에는 플리마켓 등이 열리는 곳으로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비록 다운타운이 위험하긴 해도 그래도 공권력이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는 시청 앞이므로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


권위를 벗고 문화를 입다
충남도청사


옛 충남도청사는 대전광역시 중구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매우 특이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데 충청남도청이 대전으로 최초 이전한 년도가 1932년이라 한다. 아직은 대전광역시가 생기기 전으로 대전부(후에 시)로 불렸다. 광역시 이전에는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한다는 의미의 직할시가 여럿 있었는데 대전시가 대전직할시로 행정적 위상이 올라간 것이 1989년이다. 이때부터 대전시(직할시-광역시)가 충청남도에 포함되어 있는 도시가 아닌 상호 배타적인 행정 경계를 갖는 행정구역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도청사의 이전 문제를 수면 위로 끄집어내었다.


대전시와 충청남도는 이웃한 동등한 법인격을 갖고 있음에도 충청남도청이 대전시에 위치하고 있으니 당연히 이전에 관한 요구가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충남도민이 민원을 위해 대전시를 방문해야 하는 것은 여러모로 이상하다. 2012년 충남도청사가 내포신도시로 이전하였다.


이 건물 2층 건물로 1930년대 초반에 완성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우리나라의 아기자기한 전통적 색채보다 일본의 단순하고 권위와 위엄을 강조한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드는 건물이다. 건물의 완공 후 충청남도 청사가 이전하게 된다. 한편 건물은 1960년 3층으로 중측을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에 이르렀다.


옛 충남도청사는 3층의 벽돌 건물이다.


증축이 1960년에 이루어졌다.


우리 민중의 설움과 아픔, 고통과 고난이 곳곳에 묻어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건물은 6.25 전쟁 이후 새로운 대전과 대전 부흥기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로 탈바꿈하였다. 비록 수탈의 공간이었어도 이 또한 우리의 역사로 이후의 삶은 우리의 민중과 함께 한 건물이다.


이 건물의 2층 중앙 테라스에서 밖을 바라보면 매끄럽게 쭉 이어진 도로를 만날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대전천을 지나 대전역 광장에 이를 수 있다. 아마 독재자는 이 건물의 2층에서 마치 조선을 다 가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 길 위의 민중은 이 건물을 바라보며 하염없는 무력감에 몸서리쳤을 수도 있다. 중심 도로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건물. 위엄과 권위를 건물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표현하고 있다.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대전중앙로


이 건물은 재활용에 있어 커다란 제약 조건이 있다. 대전시에 위치한 청사 건물임에도 소유가 대전시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도청사의 내포신도시 이전이 발표된 후부터 이는 뜨거운 감자였다. 대전시는 과연 이 건물을 어떻게 매입하여 어떻게 재활용할 것인가. 매입부터 상당한 비용이 들터였다. 지금 현재는 국가의 매입이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가 매입하여 대전시에 무상으로 장기간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도록 한 것이다. 대전시는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과 수업이 이루어지는 플랫폼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지금 현재는 도시재생 부서와 서민금융지원을 위한 센터 그리고 일부 공간은 만화웹툰창작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의 활용


이제 내부 공간을 만나보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만날 수 있는 계단이다. 둥근 원형으로 디자인된 것이 매우 색다르다. 그런데 혹시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구조물을 본 적이 있다면, 거의 충남도청사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면 된다. 각시탈, 변호인 등과 최근의 미스터 선샤인에 이르기까지 시대극의 경찰서나 관서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매우 친숙한 공간이다. 근현대사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상 작품 중 이 공간을 활용하지 않은 작품을 찾는 것이 쉽다고 주장한다면 아주 허무맹랑한 주장은 아니다.


드라마 등에 자주 등장하는 계단


계단을 측면에서 찍었다.


건물의 복도는 오래된 대학교나 고등학교의 느낌이 난다. 매우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창틀도 보존되었다. 물론 보수 공사를 거쳤겠지만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겨울에는 매우 추울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초등학교 시절 학교의 창틀 같아서 정겨움이 묻어난다. 거의 모든 공간이 단순하고 심지어 권위적인데 비해 창틀의 디자인은 꼭 그렇지는 않았다.


복도를 따라 여기저기 둘러보면 전시 공간도 눈에 띄고 비어있는 공간도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다. 대전 구도심 재활력의 대표적 사례로 힘차게 비상할 날을 기대한다.


내부 복도


여기도 복도


창틀


이색적인 것 하나는 도지사 집무실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초의 도지사부터 이 공간을 활용한 마지막 도지사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볼 수 있으며 도지사의 집무 모습을 상상해볼 수도 있다. 의자에 앉으면 마치 직접 도정을 운영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설명해주시는 설명사가 계셔 궁금한 것은 여쭤볼 수도 있다.


도지사 집무실


바닥의 자재가 매우 인상적이다. 작은 타일이 오밀조밀 박혀있다. 큰 무늬가 없어도 타일 자체가 그 당시 원했던 위엄과 권위의 색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후기


건물 자체는 상당히 권위적이었다. 현대에 만나기 쉽지 않은 건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의 미래를 예견하는 팻말과 공간을 만날 수 있었다. "만화웹툰창작센터"


이 건물은 이제 권위를 벗으려 한다. 권위를 벗고 창작자들의 창작 욕구와 창의성이 문화라는 날개를 달고 도시를 덮을 수 있도록 그런 플랫폼의 공간으로 다시 한번 진화하려 한다. 권위와는 가장 동떨어진 예술의 영역이 바로 '만화'아닐까. 현재에도 입주해있는 만화웹툰창작센터가 바로 이 건물의 미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에는 작가들의 혼이 숨쉬고 있다


오래된 건물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옛 충남도청사는 아픈 우리의 삶이 숨 쉬는 곳이다. 권위와 위엄의 상징으로 일본의 제국주의가 연상되는 면도 존재한다. 위치에서 외형과 내형에서 우리의 전통보다 일본의 권위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6.25 전쟁을 거치며 대전시 부흥의 한 자리에서 대전시민의 애환을 모두 담아내며 한결 같이 서있었던 건물.


이제 그 공간이 권위를 벗고 문화를 입으려 한다. 앞날에 큰 축복이 있기를. 수많은 작품이 이 공간에서 탄생하여 한국 문화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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