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라는 꿈 (1)

일과 사랑을 다 가질 수 없다면

by 김혜원


내가 왜 어쩌다 전업주부가 되었는지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스물여덟 (당시로선)이른 나이에 갑자기 결혼을 하고 이듬해에 갑자기 일을 그만두는 나를 보고, 함께 일하던 친구는 그랬다.

"야! 너 방송판에서 제일 유명해질거라고 했잖아, 결혼 했다고 일을 그만둬? 왜 이래? 너 아직 서른도 안됐어!"


나는 그 때 세상 방실방실 웃었던 것 같다.

"나 솔직히 일하는 것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해. 나 진짜 현모양처 될 거야. 남편 잘 보필하고 애도 잘 키우고 싶어. 회사는 내 거 아니지만 가정은 완전 내 거잖아."


친구의 뜨악하던 얼굴이 생각난다. 그날 이후 친구와는 연락이 끊겼다. 나 손절 당한 걸까...




내 입에서 현모양처라는 말이 나올줄은, 나도 몰랐다. 내가 자란 시대는 과거와는 다른 줄 알았다. 실제로는 몰라도 어쨌든 겉으로는 모두가 '남녀평등'이니 '알파걸'을 말했다. 여자도 얼마든지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비록 유리천장이 있어도 끝까지 헤딩을 해야 한다고. 우리들에게 '취집' 가장 모욕적인 단어였다.


나도 한때는 누구 못지않게 꿈과 야망이 큰 여자였다. 내향적이긴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것에 나 자신을 활활 태우고 싶었다. 대학시절 내내 쉬지 않고 여러가지 경력을 쌓았고, 졸업 전에 인턴 생활과 방송 아카데미를 병행하다가 방송 일에 목표를 잡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워커홀릭'이 나의 자랑인 시절이었다. 방송 운도 따라 주어서 좋은 프로그램들을 거치면서 나는 잘 성장하고 있었다. 밤샘이 밥먹듯이 많은 고된 일자리였지만 뭔가가 될거라는 기대를 품고 20대를 살았다.



년이 지나자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는데, 그러자 나의 마음속은 약간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선망하던 직업이고 일의 성취감이 컸지만 소위 '결혼 적령기'라 부르는 나잇대에 접어들면서 나를 점점 불안하게 만드는 생각이 있었다.



어라, 결혼한 사람이...없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당시 내가 접한 작가들 중에는 결혼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했어도 아이는 갖지 않았다. 그만큼 일을 사랑하는 건가?하니 그냥...여건이 안된다고들 했다. 결혼하면 이 일을 계속 하기 힘들다는 명확한 암시였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들처럼 될까 봐 무서웠다.(언니들 미안해요... )나는 결코 비혼주의자가 아닌데, 수년간, 사회에서 확고한 자리를 가지면서도 좋은 연애도 하고 아이도 기르는 선배를 거의 한 명도 사귀지 못했다는 게, 롤모델이 없다는 게 엄청 불안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내 인생 계획에서 당연한 수순인줄 알았던 '결혼하고 아이도 키우면서 일도 잘 하는 나'는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느 날엔 술김에 주마등처럼 나의 미래가 머릿속을 스쳤는데, 바로 내가 내심 '노처녀 히스테리 부린다'고 생각하던, 나를 참 괴롭게 하던 바로 그 선배의 모습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선배 죄송합니다....) 프리랜서 방송작가의 불안한 고용환경과 부당한 처우라는 직업 현실도, 불안감 한 몫 했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게 맞나?식의 이런저런 의심이 들자, 어느 순간.. 한때는 내 꿈이고 목표였던 일이 조금씩, 도망쳐야 할 것 같은 덫처럼 느껴졌다.


금 생각하면 그때의 내가 너무 아쉽다. 만약 과거로 가서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반드시 후회할 테니 어떻게든 꼭 버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저 일테기이고, 지나갈테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좋아하는 일이라면 거기서 무조건 버티고 버티라고. 롤모델은 필요없고 네가 롤모델이 되면 된다고..


하지만 그때에는 몰랐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이게 아니라는 생각, 알고보니 현실은 냉정하고 나는 가정과 일 중 양자택일 선택의 기로에 선 것 같다는 불안이 너무나 컸다.




그러다(남편 될) 오빠를 만났다. 10살 연상인 그는 사회적 성취도 이룬데다가, 산전수전을 겪어 인생 경험이 깊었고 자기 중심이 뚜렷했다. 삶에서 중요한 게 무엇이고 목표가 무엇인지 이미 다 고민해 본 사람이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더니... 방송가에서 롤모델을 찾기에 실패하자마자 그가 나타나서 첫 만남에 나의 새로운 롤모델로 등극했다. 그리고 두번째 만남에서, 신애라처럼 살고 싶던 나에게.. 그가 차인표처럼 살고 싶다는 말을 하는 순간, 그는 롤모델에서 남편으로 내정되고 말았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 순간, 나는 내 삶의 중심을 나 자신으로부터 그에게로 옮던 게 아닐까 싶다. 대리인생의 시작이랄까. 당시에는 운명이라 확신했는데,, 쓰다보니 거의 확실하게, 나의 결혼은 상당부분 불안과 충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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