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보통 '주부' 라고 쓰는데 그 때마다 나는 기분이 묘해진다. 조금 움츠러드는 것도 같다.
주부가 직업이 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주부는 직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업'주부라는 단어가 이미 주부는 직업임을 암시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직업이 과연 직업이 되는건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찜찜한 마음 탓인지, 주부라는 직업에는 더욱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적인 기분이 들었다. 왜, 어쩌다 못생기고 돈도 없고 성격도 지랄맞은 사람에게 빠져 사귀게 되면 내가 왜 이런놈을 만나지?라는 혼란-인지부조화-을 다스리기 위해 "내가 정말 많이 순수하게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 쇄뇌하는 거랑 비슷한 거 아닌가 싶다. 전반적으로 주부와 엄마의 역할을 전담하는 전업주부의 이미지에는 이런 억지가 좀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하는 이 일이 정말 삶의 기초가 되는 고귀하고 중요한 일일까?자부심을 가지고 보람을 찾을만한 훌륭한 일일까? 잘 모르겠다.
사회에서는 엄마는 여자보다 강하다느니 주부는 가정을 책임지는 전문 경영자라느니 그런 말을 잘도 해대는데, 정작 주부들이 집밖에서 일자리를 찾으려면 전업주부는 경력으로도 안쳐준다. 그렇게 고귀하고 숭고한 일이면 왜 집안일과 육아를 함께 하자면 남편들은 곤란해 하겠는가 말이다. 다들 겉으로는 찬양하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이건 아무래도 시덥잖은 뒤치닥거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사실이 그렇다.
예를 들어 매일 다른 요리법으로 미학적으로도 영양학적으로도 완벽한 밥상을 차려낸다고 해서 밥하는 일이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요리 활동은 저 밖에서 셰프들이 돈을 받고 하는 것이다. 또한 친환경적이고 용도별로 세분화된 세제를 사용해서 빨래를 예술적으로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멋지게 수식해도 집안일의 본질은 기본적인 욕구 해결일 뿐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편의를 위한 일이니 그 안에서 기쁨도 만족도 행복도 성취감도 물론 종종 느낀다. 나는 집안일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교육을 충분히 받은 여자 어른에게 평생 직업이 되기에 이 일은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봉사활동이다! 혹시, 주부가 직업이라는 인식은 주부들에게 자부심을 주기보다는 진짜 사회에서 통용되는 직업을 갖지 못하게끔 옭아매는 덫이 아닐까?
도대체 누가 전업주부의 지루한 일에 미사여구를 달기 시작했지?
아마 전업주부의 노동력으로 편함을 누리는 사람.
그리고 전업주부에게 다양한 살림 도구를 판매해서 이득을 보는 사람. 그리고 또 있다.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가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었던 사람. 그런데 지금 직업란에는 '주부'라고 적어야 하는 사람. 나다. 주부라는 직업에 의미부여를 가장 많이, 가장 필사적으로 했던 사람이 나였다.
이전 글에서 남편과의 다툼에 대해 적었는데, 사실 나는 남편에게 내 불평을 받아주고 감정을 다독여달라고 할 게 아니라 집안일을 분담하자고 해야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그 말을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외벌이로 4인 가정을 먹여 살리는 든든하고 능력있는 '가장'이고 나는 직장에 다니지 않는 '전업주부'니까, 집 안의 모든 일은 일단 내가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생각은 나와 남편과, 양가 부모님들과 어쩌면 아이들에게도 공유되고 있었다. 식구들이 나를 붙박이 가구같은 존재로 받아들일 때까지, 가정을 돌보는 모든 일은 내 영역이었다. 프로페셔널 주부, 직업으로서의 주부라는 환상을 쫒았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다. 자기 파괴적인 책임감이란 게 있다면 이런 걸지도 모른다. 직업이니까, 징징거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나를 얼마나 자주 채찍질 했던가..
이제와 생각해 보면 주부가 직업이라고 쳐도 그 책임감은 과했다. 쓸데 없이 온 몸에 힘을 주고 버텼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게 나만의 집착이었을까? 내부적으로는 몰라도 외부에서 보여지는 나는 참한 주부였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칭찬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라도 훌륭한 직장인, 쓸모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계속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는 직업이라는 개념도 달라지고 직장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도 많이 변했다는데, 왜? 주부라는 직업(직업으로 친다면)만은 여전히 한 사람의 온 인생과 시간을 다 바치길 바라는 것일까. 한 사람의 삶을 갈아 넣어야만 유지되는 게 가정이란 직장이라면, 그런 직장이 잘못된 것 아닌가.
10년간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주부란 직업에 투신해 본 내가 이제와 깨달은 게 있다면 아무래도 주부는 직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주부라는 이름으로, 사랑에 기반하는 무보수의 숭고한 봉사활동, 나는 그렇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정의하게 되었다.
자발적인 봉사활동임이 밝혀진 마당에, 나에게 사정이 생겨 이 활동을 그만두거나 대폭 축소한다고 해도,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더 이상 전업주부로만 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