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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작가 Jul 17. 2024

시작, 끝없는 시작

시작은 늘 두렵다. 어느 시작도 쉬운 시작은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나에게는 내가 해왔던 모든 선택들이 아주 어렵고도 최선이길 바랐던 것들이었고, 결과적으로 이번 선택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작은 인생의 새로운 막을 시사한다. 새로움은 두렵지만 또 새로움은 설렌다. 우리는 끝도 없이 실패하지만 또 다른 시작에 있어 끝도 없이 설렐 자격이 있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인생의 의미를 멈추지 말고 찾아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의 이유다.

시작을 셀 필요는 없다. 시작과 끝의 반복으로 마음이 지치고 버거워지더라도 몇 번째 시작인지는 알 필요가 없다. 어차피 모든 일에 끝은 있다. 빠르냐 느리냐의 차이다. 늘 끝을 두려워한다면, 언젠가 오게 될 끝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면, 너무 먼 미래까지 생각하게 된다면,

결국 마음만 지칠 뿐.

실패하고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좋든 나쁘든 경험이었다. 그 경험으로 처음으로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완전한 타인에게 화를 내는 법을 배웠고, 나를 지킬 수 있는 법을 배웠다. 전혀 후회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아닌 것들을 참아가면서까지 일을 해야만 하는 게 내 가치관은 아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나는 내 소신대로 하면 된다.

/

꿈을 꾼다.

도망치는 나를 향해 비웃음을 보이는 까만 얼굴들.

그러면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는 깬다.

살면서 도망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던 많은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 장면들에서 도망 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 나에게는, 내가 도망을 선택하지 않았던 무수한 순간들도 존재한다.

지난여름쯤, 나이트 퇴근 후 이른 아침에 놀이터 그네에 앉아 멀리 사라져 버리고만 싶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눈물을 흘리고, 건강을 해치고, 마음이 찢어지고, 사라져 버리고만 싶었던 날들 속에서도 끈질기게 버텨왔던 순간들도 기억 속에 가득했다.

그 순간들을 잊지 말아야 하고, 이제는 자책하지도 말아야 한다. 앞으로의 날들을 살아야 한다.

몇 번째인지 모를 나의 이번 시작 출발선에서는 나도 조금은 더 성장한 사람이었다. 공기의 무게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음에도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내가 괜찮은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가야 한다.

새로운 곳에서 네 번째 첫 출근을 한지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평화로웠던 지난 일주일이었다.

어쩌면 새로운 기회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한 가지 일만 하며 살기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사람이다.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

글을 쓰고, 영어공부를 하고, 커피를 내려 마시는 일, 내가 사는 공간을 꾸미고, 멋진 옷을 입어보기도 하는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많다.

몇 주 전 동기 언니와 통화했다.

"내가 언제 뒤질지도 모르는데, 난 왜 내가 불행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지금이 좋아. 쉴 땐 쉬고, 일할 땐 일하고, 오프 때는 남자친구랑 놀러 다니고. 별 것도 아닌 걸로 히스테리 부리는 사람도 없고. 나는 지금이 행복해. 그러니까 너도 네가 행복한 곳에서 일하면 좋겠어."

동기 언니는 로컬 재활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나도 이제 그곳에서 일한다.

별 것 아닌 것들에서 상처를 받아왔던 나는,

또 별 것 아닌 것들에서 치유를 받기도 한다.

그들의 의미 없는 말과 의미 없는 행동조차도, 나를 이곳의 사람으로 소속감이 들도록 만들어주는 모든 것들에서도, 차츰 마음의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지치는 순간이 있더라도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은, 내가 소속되고 싶은 곳은 이곳인 것 같다.

분명 또 내가 헤쳐나가야 할 위기들이 있을 거다. 그렇지만 두렵지는 않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게 어떤 일인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떤 간호사이고 싶은지, 어떤 곳에서 오래도록 일하고 싶은지, 10년 후에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기를 바라는지, 그런 것들을 말이다.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없지만 확실한 건, 안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편하다는 이유로 발전할 가능성들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새로 이사 온 동네에 학교 동기가 산다. 나에게는 거의 몇 개월 만에 친한 친구를 만나는 날이었다.

나의 중고등학생 때 친구들은 모두 간호사다. 거의 대부분이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 친구는 연구간호사를 하고 있다. 친구는 3교대와 임상이 맞지 않아 작년부터 일찍이 연구간호사로 빠졌다. 그때의 나는 사실 친구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나는 내가 임상에 완전히 맞는다고 생각해서다. 그렇지만 그건 내 오만함이었다. 일이 쉽든 어렵든 복잡하든 아니든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맞는 일이 있다.

어쨌든 내 친구들 중 유일하게 임상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 친구이며 대학병원을 퇴사한 친구이기 때문에 같이 공감하고 대화할 점들이 많았다. 대화하면서 많은 위로와 안도를 얻었다.

같은 동네에 사니 종종 보기로 약속하며 헤어진 우리.

/

주변 사람들 중에 간호사밖에 없으니 사실 직업에 대한 내 시야도 많이 좁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그래서 내가 더 불안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핑계들도, 수동적인 태도도 버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시야를 넓히기로 했다.

새로 시작한 일도, 새로 시작한 공부도,

새로 살게 된 집도 동네도,

새로 만나는 사람들도,

낯설고 무섭지만 마음을 주기 위해서 노력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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