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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작가 Jun 23. 2024

나에게만 힘든 일-1

사람마다 통증의 역치는 다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 역치는 훨씬 낮았나 보다.


가장 먼저 느낀 건 자괴감이었다. 그곳에서 버티지 못했다는 자괴감. 버텨내지 못하는 내가 너무 약한 사람인 것만 같은 그런 자괴감.


왜 봄인 거지?

따뜻하고 예쁜 어느 봄날에 나는 어째서 내내 울어 아픈 머리를 짚고 나를 원망하고 있는 거지? 피곤함과 심적인 힘듦에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했다.


원망이 들렸다. 그런 것 같았다.

넌 왜 참지 못하니?

겨우 그걸 못 참니?

앞으로 어떡할 거니?

그건 사실 전부 내 목소리였다.


루틴이 익숙해지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4년 차 간호사인 언니의 말. 이럴 땐 좋은 말도 나쁜 필터를 씌우고 듣게 된다.

나를 위한 말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나도 이미 다 아는 말들이다. 내가 바란 건 당연하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난 그저 내가 나에게 해주지 못하는 말들을 원했다. 그뿐이다.

/

현장교육선생님께 먼저 면담을 신청했다. 퇴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면 그 사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충분히 그런 고민을 했을만한 상황이었네요. 이 문제는 간호부에서 더 이야기를 해봐야 하는 문제인 것 같아요."

현장교육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시고 공감해 주셨다. 내가 너무 힘들다면 수선생님께 대신 말씀드려 보겠다고도 해주셨다. 그러나 결정은 내 몫이었다. 특정 인물의 실명을 꺼내 문제를 수면 위로 꺼내기 위해서는 나의 실명도 꺼내야 한다.

"제 이름까지 말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 잘 압니다.

저는 문제를 해결하고 더 일할 마음이 들어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저는 이미 퇴사하기로 결정했고, 오히려 이 문제를 알리고 제 상황을 모두가 알았으면 해서 말씀드린 거니까요."

그렇게 현장교육선생님과의 1차 면담이 끝났다.

곧 수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2차 면담이었다.


/

수선생님과의 면담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조차 괴로워서.

그래서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길로 가지 못했다.

처음 보는 육교를 건너는데, 육교 양쪽으로 쭉 뻗어있는 벚꽃나무들.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도, 강아지들도, 아이들도 많았다.

행복해 보였다.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었다.

'내내 행복하렴'

마음속으로 말해주었다.


수선생님은 현장교육선생님께 전해 들은 나의 이야기를 나에게 직접 다시 들으셨다.

현장교육선생님과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이셨다.

"그날 그 시간대가 바빴기 때문에 다소 거친 말과 말투였을 수는 있어. 그 선생님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니라, 책임자라는 게 그래. 그 듀티를 책임지려다 보면 목소리가 커지고 말이 잘못 나올 수도 있어. 그래, 당연히 그 선생님도 고쳐야 할 필요가 있어. 하지만 선생님도 조금만 그 상황에 대해서 조금만 이해를 하고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해 보는 건 어때?

어렵게 입사했잖아. 그게 아깝지 않아? 그저 그 일 하나로 선생님의 인생에서 큰 결정을 그렇게 덜컥 내려버리는 게?"

회유당할 뻔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다면 내가 정말 내 인생에서 커다란 기회를 발로 뻥 차버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다.

하지만,

면담을 하기 전까지의 4일이라는 시간 동안 어떤 생각까지 했는지,

그 일이 나를 얼마나 많이 괴롭혔는지,

내가 아닌 사람은 모른다.

내가 아닌 사람은 판단할 수 없다.

"선생님. 저는 간호사가 좋아요. 작년에 다른 곳에서 일하면서 오프도 얼마 못 받고 힘들게 일했는데도 저는 그래도 행복했어요. 잘한 건 인정받았고 못한 건 꾸지람 들으면서 일하는 게 그저 좋았고 많이 행복했어요.

그런데요, 제 노력과 에너지를 쏟은 일들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이런 누명을 써가면서,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 일을 하는 곳이라면 저는 여기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눈물도 떨리는 목소리도 참을 수 없었지만 해야 하는 모든 말들을 전달했다. 후회는 없다.  

"선생님 생각이 정 그렇다면 내가 어쩔 수는 없는데, 나갈 때 나가더라도 나도 그 선생님에게 말해둘 테니 사과는 받아."

엄마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배터리가 나가기 직전이라 스타벅스로 향했다.

휴대폰 충전을 꽂아두고, 주문한 시그니처 초콜릿의 휘핑이 거의 녹아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생각에 잠겼다.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울지 않고 말할 자신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마침내 전화통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충전이 된 후에, 통화목록에서 엄마를 찾았다.

"그 사람 인성이 아주 못됐네."

어렵게 꺼내놓은 이야기에 엄마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엄마. 내가 더 버텨야만 했어? 내가 못 참은 거야? 내가 너무 약한 사람인 거야?"

그 말을 하면서 내내 겨우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우는 나를 힐끗힐끗 보았다. 그렇지만 그런 시선들은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았다. 내 마음이 이미 무너져버렸는데 그 시선들이 무슨 소용이겠냐고.

"아니야. 그렇지 않아. 지나간 일은 이제 생각하지 마. 너는 잘못 없으니까. 그 사람이 나쁜 거니까.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자."​​​​​​​​​​​​​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엄마만 내 편을 들어준 것뿐인데 모든 일이 해결된 것 같아서. 온 세상 고민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곧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멈췄다.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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