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나무 Oct 31. 2022

오랜만입니다

2022년 10월 30일

당신에게


어느 새 11월을 앞두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안부를 물었던 이후로 벌써 반 년이 흘러갔네요. 단조로운 일상치곤 꽤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참 다채로운 오후 두 시를 보냈네요. 코로나에 걸려 일주일 간 격리를 하기도 했고, 아끼고 좋아했던 동료를 떠나보내기도 했고, 출장도 세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일이 많아서, 통역을 망해서, 상사가 미워서, 갖가지 이유로 펑펑 울었던 밤도 있었습니다만, 김치를 담그거나 만두를 빚고, 음악을 듣고, 한낮에 와인을 마시고, 루미큐브에 목숨을 걸며 즐거웠던 낮도 많았습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일상은 우리를 길들이고, 늘 새롭기만 했던 마다의 일상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듯합니다. 출근길과 퇴근길의 풍경도 어느새 무감각한 생활의 배경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처음엔 회사와 집을 잇는 길의 풍경이 너무 예뻐서 일부러 먼 길을 돌아 귀가하곤 했었습니다만, 요즘은 그저 집에 돌아오기에 급급합니다. 정신없이 밀려드는 일에 지친 것일까요. 그래도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일몰이나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은 늘 처음처럼 내 걸음을 멈춰 세우는 풍경입니다.


오늘은 출장지에서의 오후 두 시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가장 매운 맛이었던 남부 출장이 좋겠습니다. 마다가스카르의 남부는 기후변화 때문에 가뭄이 아주 심각합니다. 세계 5위 최빈국인 이 나라 안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이지요. 시내의 숙소는 무척 열악했습니다. 뚜껑도 없는 변기와 낡은 샤워기가 침대와 한 공간에 있는 그런 곳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전기는 9시면 끊기며, 수도관으로 물이 나오지 않아 낡아빠진 큰 플라스틱 통에 뜨거운 물과 찬물을 담아 현지인이 방까지 날라주었습니다. 찬물을 바가지로 퍼서 변기물을 내렸고, 물의 위생을 확신할 수 없어 양치와 세수는 생수로 대신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숙소보다 더 참혹한 현실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흙먼지를 뒤집어 쓰며 돌길을 네 시간 동안 달려 도착한 곳에는 내가 아는 '가난'이라는 말로 표현이 부족한 세상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정수리 위로 자비없이 내리쬐는 햇볕과 사방이 바싹 마른 붉은 흙뿐인 불모지. 말라 비틀어진 선인장들. 더러운 수통과 흙과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섞어 만든 주거지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아이를 낳고 먹이며 살아가는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빈곤, 기근, 기아... 사무실에서 수없이 썼고, 읽었던 활자를 현상으로 빚으면 이런 모습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명의 부재나 빈곤의 참상보다도 더 큰 파동으로 다가온 건 불평등에 대한 체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기와 뜨거운 물이 펑펑 나오는 대도시 타나, 식생이 풍부해 환상적인 정글 같았던  삼바바,  탁 트인 아름다운 해안이 있던 디에고. 내가 방문했던 마다가스카르 중 이렇게 척박하고 마른 땅은 없었습니다. 하나의 섬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까마득한 이 불평등의 낙차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국적을 선택해 태어날 수 없듯이, 이 가난한 땅 안에서도 어느 지역에 태어나느냐가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니. 이 모든 게 거대한 룰렛게임처럼 느껴졌습니다.


타나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신의 룰렛게임이 나를  지역에 태어나게했다면, 나는  운명을 거스르고, 빈곤에서 벗어나   있었을까. 아니, 다르게   있다는 상상조차   있었을까. 나는 지금까지 이뤄온 크고 작은 성취들로, 대체로 인생에 자신감이 있는 편이었습니다만,  질문에는 자신있게 대답할  없었습니다. 지금껏 힘으로 인생을 만들어 왔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태어난 순간부터 거저 주어진 기회가 너무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온전히 나의 것이라도 부를  없는 것들을,  혼자 갖는 것이 합당한걸까. 어떤 답을 해야할지 아직도 나는  모르겠습니다.             


타나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자 기분 좋은 서늘한 바람이 피부에 닿았습니다. 가난에도 층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일까요. 출장을 다녀온 이후로 타나를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연중 온화한, 축복받은 날씨와 맑은 하늘이 가장 먼저 피부로 느껴집니다. 사람들의 옷이 상대적으로 깨끗하다는 것도, 모든 사람이 신발을 신고 있다는 것도, 수도꼭지로 뜨거운 물이 펑펑 쏟아지며, 24시간 전등을 켤 수 있고, 도로에는 자동차가 가득하며, 마트에 생필품들이 쌓여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왜 이렇게 이 작은 수도에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좁아터진 도로에 끝도 없이 차들이 줄을 서 있는지, 왜 도시 빈민이 즐비한지...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요즘입니다.


쓰다보니 편지가 길어졌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겪는 오후 두 시는 여전히 처음 만나는 세상으로 가득합니다. 아름답고 따뜻하기만한 세상은 아닙니다만, 분명 내게 의미 있는 경험이겠지요. 이런 오후 두 시가 모여 나는 지금과는 또 다른,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믿습니다. 다음 주에는 또 다른 곳으로 출장을 갑니다. 그 때는 조금 더 행복하고 다정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길.   


2022년 10월 30일

사과나무 드림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