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가 필요한 것은 내 집 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집 식탁 옆에는 커다란 박스 하나가 뜯지 않은 채로 놓여 있다. 박스에는 영어로 된 글씨가 잔뜩 쓰여 있다. 무게도 상당하다. 이 박스가 우리 집으로 배송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박스 안에는 미국에서 유명하다는 브랜드의 접시가 30개나 들어 있다. 백화점에서는 한 개당 몇 만원에 팔리는 접시다. 1년 쯤 전의 어느 날, 직구 카페의 게시글을 구경하다가 ‘핫딜’이라는 말에 홀려 199불에 충동 구매한 접시세트다. 미국 직구의 경우 200불이 넘는 물품에 관세가 붙는다. 즉, 200불까지는 무관세로 국내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구입할 수 있지만, 200불이 넘으면 관세가 붙어 적게는 18퍼센트에서 23퍼센트까지 세금을 추가로 납부해야 한다. 그래서 200불은 미국 직구의 마지노선이다. 이 접시세트는 199불이라 무관세였기에 직구족들 사이에서는 핫딜 중의 핫딜로 꼽혔었다. 그렇게 나도 홀리듯이 이 그릇을 결제했다.
배송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미국의 쇼핑몰은 친절하게도 우리 집 앞까지 직배송을 해주겠다 했다. 그래서 이 거래가 ‘핫딜’이라 불리는 것이다. 무거운 그릇은 국제배송비도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직배송 조건이었기에 배송비를 따로 내지 않고 접시는 무사히 우리 집까지 왔다. 택배 아저씨가 끙끙대며 상자를 집 앞에 두고 가셨다. 무겁기도 하고, 행여 깨질까봐 조심스러워서 상자를 집안으로 옮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주방은 좁았다. 정확히 말하면 물리적인 공간이 좁다기보다는 자질구레한 잡동사니가 너무 많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30개나 되는 접시를 집어넣을 공간이 없었다. ‘주방이 정리될 때까지’라는 핑계 하에 접시가 들어있는 상자는 뜯지도 않은 채 1년이 다되도록 작은 방 한쪽구석에 방치되었다.
얼마 전, 접시 상자가 있던 작은 방에 변화가 생겼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큰아이가 자기 방을 만들어달라고 날마다 졸랐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 취향의 핑크빛 싱글침대가 들어왔고, 곧 책상도 들여야 하기에 방을 차지하던 잡동사니들을 몽땅 치웠다. 이 상자가 문제였다. 1년이 지나도 주방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정리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심지어 주방에 그릇장 하나가 더 생겼지만 다른 잡동사니로 가득 채워지고 여전히 접시 30개가 들어갈 공간을 만들지 못했다.
문제는 주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2년 전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나는 이사하는 현장에 있을 수 없었다. 둘째를 돌봐야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사 오기 전에 짐을 꼼꼼히 정리해두지도 못했다. 버릴 것을 미리 버렸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이사였다. 그 시기는 둘째 아이의 발달장애 판정을 받았던 때라 내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져 있었다는 말이 맞다. 그 때는 아이의 치료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이사도 아이가 너무 뛰는 까닭에 1층으로 옮기기 위해 한 것이었다. 포장이사 센터의 직원들은 정리되지 않은 주방의 짐들을 싱크대와 그릇장에 마구 쑤셔놓고 돌아갔다. 다른 방의 짐들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들도 달리 방법이 없었을 거라고 짐작은 된다. 짐을 싹 꺼내서 다시 정리해야 하는데, 매일 아이를 데리고 치료센터를 돌아다니고, 큰 아이까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그 시기의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게다가 남편은 지방 발령을 받아 주말에만 집에 돌아왔다. 종일 육아에 시달리고 아이들이 잠든 다음에는, 나도 같이 쓰러져 자거나 드라마를 보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겨우 생긴 소중한 휴식시간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정리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정리되지 않은 집은 외출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한숨이 나게 했다. 깨끗한 다른 집처럼 나도 좀 치우고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을 순간 했다. 하지만 일상은 또 빠르게 흘러가고, 나는 바쁜 내 삶 속에 ‘정리할 시간’을 따로 배당하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 안방에도 거실에도 물건들이 쌓여갔다. 집에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 물건이 잔뜩 쌓여있는 더러운 내 집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리할 것, 버릴 것은 늘어만 갔고 정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버렸다.
며칠 전 책을 한 권 샀다. ‘1일 1정리’라는 제목의 책(심지은, i’or book)이었다. 정리의 노하우에 대한 책은 그간 여러 번 접해봤지만, 큰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서점 사이트에서 미리보기로 잠깐 내용을 보았다. 하루에 단 15분 동안만 정리를 하라고 써있었다. 산더미 같은 일거리에 엄두가 안 났던 나 같은 사람에게 스톱워치로 15분을 정해두고 하루에 딱 그 시간만큼만 정리해도 된다는 말은 꽤나 매력적으로 들렸다. 매일매일 어떻게 15분 동안 정리할지, 버리지 못하는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책이 짚어주고 있었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저자가 시키는 대로 딱 15분 동안만 쓰레기봉투를 들고 돌아다니며 집안 여기저기에 있는 버릴 것들을 눈에 띄는 대로 집어넣었다. 정리를 시작하는 가장 첫 단계의 일이었다. 놀랍게도 봉투가 금방 가득 찼다. 몇 달 동안 화장대 옆에 있던 잡동사니 바구니가 비워졌다. 아예 낡은 바구니까지 싹 버렸다. 안방이 넓어졌다. 쌓였던 먼지까지 청소기로 빨아들이고 나니 기분이 한결 가뿐해졌다.
처음에는 공간을 정리하고, 그 다음에는 시간을 정리한다. 쓸데없이 낭비되고 있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라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관계를 정리한다. 마지막으로 금전, 즉 소비를 정리한다. 진정한 미니멀 라이프로 나아가기 위해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정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동경은 그다지 없지만,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는 깊이 공감했다. 특히 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나에게 의미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 정리, 감정이나 에너지를 소모할 뿐인 관계를 과감히 끊는 것. 나이가 들수록 더욱 필요한 일이라고 느꼈다. 2년이 지나도 연락 한번 하지 않는 사람들의 연락처를 휴대폰에서 지우는 일을 망설이지 말라고 한다. 내 휴대폰에도 오래 전 퇴사한 회사 사람들의 연락처까지 빼곡히 저장되어 있다. 정리는 어쩌면 우리 집 뿐만 아니라 내 삶 전체에 필요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의 쓰레기봉투를 시작으로 저자의 말처럼 내 삶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게 되면 좋겠다. 작은 방에서 탈출해 식탁 옆에 방치되어 있는 접시 상자도 이제는 개봉할 때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 조만간 쓰레기봉투를 들고 주방의 잡동사니를 15분 동안 한바탕 버려야 할 것 같다. 15분으로 모자라면 며칠이 걸릴 수도 있지만 말이다. 절대로 하루에 30분, 45분 동안 정리는 하지 않을 계획이다. 그러다 지치면 장기적인 정리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길까 두렵다. 언젠가 물건이 가득 올려져 있는 아일랜드 식탁의 상판을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문을 열면 먹다가 남아 묶어둔 과자봉지들이 잔뜩 쏟아져 버리는 거실 수납장에도 여유 공간이 생길 날이 올 것이다. 침대 옆 의자에 쌓여있는 옷가지들도 그 때에는 제자리를 찾아가겠지. 이불이 삐져나와 잘 닫히지 않는 장롱문도, 거실에 대책 없이 쌓여있는 장난감 바구니들도 작별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휴대폰 저장 공간을 꽉 채운 오래된 사진들도, 더는 볼 일이 없을 사람들의 연락처에도 언젠가는 삭제 버튼을 누를 수 있을 것이다.
쌓아두고 방치했던 것은 비단 물건뿐만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의욕이었던 것 같다. 아이의 장애판정이라는 인생의 크나큰 벽을 만난 이후로, 나는 몇 년 동안 아이의 치료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하여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몇일 전 문득 ‘이쯤 되면 정리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홀연히 들었다. 지난 몇 년간 많은 것을 내려놓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내 마음은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 같다. 내 눈에 접시 상자가 보인 그 때부터, 1일 1정리라는 책을 집어든 그 때부터 삶의 다른 국면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살아가야 하니까. 기왕 사는 것 여유롭게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비워내고 공간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내 집에도, 내 하루에도, 내 삶에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