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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May 24. 2020

아들과 걷기

두 발바닥을 땅에 대고 힘껏 밀어내는 행위의 즐거움

 지난겨울. 그러니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직 우리를 덮치기 몇 주 전의 이야기다.


 유치원 겨울방학이 시작된 지 3주가 지났다. 추운 방학 동안 우리 아이들은 학원으로, 치료센터로, 수영 특강을 들으러 수영장에 다니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덩달아 나도 오후만 되면 차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집에 진득이 앉아 시간을 보내는 날은 거의 없었다. 오전에 조금 늦잠을 잔 후 급히 밥을 먹이고 오후는 학원과 센터를 돌고 저녁때 집에 오면 아이 둘을 씻기고 저녁을 해먹이다 보면 금세 하루가 지나갔다.

 날씨가 추우니 놀이터에 나와 노는 아이들도 없었다. 오후 시간을 제외한 시간은 집 안에서 놀며 숙제하며 보내야 했다. 이제 열 살, 여덟 살인 우리 아이들은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저가형 태블릿을 받았다. 하도 컴퓨터 한 대를 가지고 둘이 싸워대길래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마침 미국의 유명한 쇼핑몰에서 하나에 6만원 꼴로 싸게 파는 태블릿이 있길래 해외 직구로 3개(내 것 포함)를 주문했다. 이젠 좀 덜 싸우겠지라는 마음에 한시름 놓았으나 다른 걱정이 생겼다. 둘별이가 정말 하루 종일 태블릿으로 각종 애니메이션 동영상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4년 전,별이의 상호작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무렵, 내가 제일 먼저 내다 버린 것은 집안에 있던 세이(펜 끝을 동화책의 글자에 접촉하면 그 내용이 소리로 재생되는 펜) 들이었다. 호비펜, 키티펜, 뽀로로펜, 그리고 동화책 전집을 사니 출판사에서 주었던 이름 모를 펜 등등. 이 모든 펜들을 가지고 별이는 하루 종일 동화책 글자에 콕콕 찍어 소리가 나게 했다. 펜으로 노래도 듣고 영어도 듣고 동화책 내용도 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나 다른 가족들과 눈을 맞추고 상호작용을 할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게다가 한참 펜에서 소리가 나다가 별이가 잠시 다른 것을 가지고 노느라 소리가 멈추면, 별이는 엉엉 울면서 펜을 집어던지고는 했었다.


 나는 처음 별이이런 행동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왜 이 아이는 끊임없이 세이팬을 틀어놓으려고 하는 걸까. 별이가 ‘전환’이 어려운 아이였기에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놀이터에서 실컷 놀다가 엄마가 이제 집에 가자고 하면 유난히 우는 아이들이 있다. 운동장에서 재미있는 무언가를 하다가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면 재빨리 교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게 어려운 아이들이 있다. 전환이 어렵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별이는 세이펜이 끝날 때 나는 소리인 “친구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자!”라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이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소리, 좋아하는 자극의 단절을 의미하는 그 소리를 견디기 힘들어 별이는 펜을 집어던지고는 했던 것이다.
   

 어릴 적 많이 보여주었뽀로로, 핑크퐁 등 각종 캐릭터가 나오는 동영상들도 한때 모두 끊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빠져들어서 놀잇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잊고 멍하니 있는 게 싫었다. 별이의 치료사 선생님들도 어린 별이에게 동영상은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며 보지 않기를 권하셨다. 약 2년간 우리 집 아이들은 텔레비전, 핸드폰, 컴퓨터의 모든 콘텐츠를 멀리하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부작용이 생겼다. 별이외출했을 때 어딘가 바깥 공간에서 우연히 동영상을 보게 되면 문제가 생겼다. 동영상이 끝나는 시점에 맞춰 온 힘을 다하여 큰 소리로 울어버리는 것이다. 평소에 접촉하지 못한 자극이었기에 더 좋았던지, 그것이 끝났을 때의 별이의 반응 또한 더욱 강렬했다. 교회에서, 식당에서,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의 핸드폰에서 나오는 동영상을 보고 나면 별이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듯 울부짖었다.


 특히 교회 유치부가 가장 문제였다. 요즘은 대부분 동영상을 활용한 교재로 아이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시스템인데, 별이는 전도사님의 설교시간마다 다른 방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영상 하나하나가 끝날 때마다 너무 크게 울어 다른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았지만, 온 힘을 다해 우는 별이를 보는 내가 더 힘들어서 아예  피해버렸다. 더 문제는 일 년 중 여러 번 있는 유치부의 행사였다.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부활절 때마다 치부 아이들은 노래에 맞춰 율동하는 공연을 했는데 이 모든 것은 동영상을 통해 교육되었다. 일 년 중 별이가 교회에서 울지 않고 돌아오는 날은 거의 없을 만큼, 유치부는 많은 행사를 준비했다.
   
 결국 이제는 별이를 동영상에 노출시켜야 할 때가 오고 말았다. 큰 아이 봄이를 보니, 초등학교에서도 영상매체를 통해 학습하는 시간이 꽤 많았다. 교실에서도 매번 그렇게 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작년부터 별이에게 조금씩 동영상을 노출하기 시작했고, 그 매체가 되는 컴퓨터가 한 대 뿐이어서 결국 태블릿을 집에 들이게 된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요즘 한창 살이 찌고 몸이 둔해져서 걱정이 되는데 별이는 밥을 먹고 나서는 꿈쩍도 않고 앉아서, 누워서, 엎드려서 동영상만 보았다. 보기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치료센터에서도 수업시간에 멍하니 있고 집중을 잘 못한다는 피드백이 자꾸 나왔다. 선생님들은 수업을 하다 말고 별이에게 트램펄린을 뛰게도 해보고, 일어서서 수업을 하는 것도 시도해 보셨다고 한다. 하지만 별이의 집중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이제 와서 다시 태블릿을 없애는 것도 무리였다. 결국 같은 상황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별이같이 발달이 느리고 감각이 예민한 아이들에게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근육을 쓰고, 걷고 달리고 몸을 움직이면 아이들은 이상하리만큼 집중력이 올라가고 반응속도가 빨라진다. 감정 조절 능력도 좋아지고,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게도 된다. 가장 좋은 것은 산에 가는 것이다. 흙을 밟으며 걷는 것이 가장 좋고, 나무뿌리와 같은 발밑의 불규칙한 장애물에 집중하면서 근육을 쓰며 등산하는 것은 아이에게 큰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느린 아이들 부모는 이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느린 아이들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에게 통용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흙을 밟고 뛰어노는 것이 아이들의 성장에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은 실천하기가 쉽지가 않다. 아이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다. 큰 아이는 배우는 데에 욕심이 많아 학원도 여러 개 다니고, 숙제도 많다. 별이도 일주일에 총 9회의 치료를 다닌다. 매일 한 두 개씩 센터를 돌다 보면 금세 해가 지고,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주말에는 아빠와 키즈카페라도 가며 몸을 움직였지만, 별이의 집중도는 그때에만 반짝 올라오다가 말았다. 그러다가 몇 주 전, 우연찮게 우리 가족은 남산에 가게 되었다. 계획에 없었는데, 별이가 별안간 남산에 가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꼬마버스 타요'에 나오는 남산이 떠올랐던 걸까.  딱히 갈 곳도 없었기에 우리 가족은 남산 중턱의 도서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남산 타워가 있는 산꼭대기까지 등산을 하게 되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긴 등산로였는데,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길이었다. 감기에 몸이 안 좋았던 나는 굉장히 투덜대며 그 길을 올라갔다 왔다. 그런데, 그다음 주 월요일, 별이의 수업태도가 현저히 좋아졌다는 선생님들의 말을 들었다. 집중도 잘하고, 질문에 대한 대답도 금방금방 나왔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다가 순간  '얼음!'처럼 멈춰버리는 현상도 줄어들었다 한다. 남산 때문이었다. 역시 걷는 것이 답이었던 것이다.

그날, 남산의 계단을 오른 이후로 우리는 종종 걸었다.


 이번 주부터 별이와 나는 동네 산책을 시작했다. 가장 좋은 것은 북한산이라도 오르는 것이지만, 코스도 너무 길고 우리의 일상이 빡빡해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누나가 학원에 간 동안, 아니면 태권도장에 간 사이에 잠시 그저 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여러 개의 놀이터를 순회하고 그네를 탔다. 가끔 빵집도 들렀다. 별이는 신이 났는지 길을 달려가며 방방 뛰었다. 그동안 실내에서만 지내서 답답했던 모양이다. 추운 날씨라 콧물이 조금 나기는 했지만, 나도 상쾌했다. 그동안 몸을 움직이는 즐거움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별이와 나는 장갑을 끼고 긴 패딩을 입고 그렇게 사람 없는 겨울날의 길거리를 걸어 다녔다. 어제와 오늘, 인지와 언어 수업이 있었다. 선생님들은 “어머님, 지난 시간과 확연히 달라요! 별이가 집중을 잘하네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내 예상이 적중했던 것이다. “선생님, 별이랑 저는 요즘 매일 40분씩 걸어 다녀요.”라고 말씀드렸더니 모두 고개를 끄덕이셨다.

 한편으로는 부작용도 있었다. 산책이 아닌 단순한 외출을 했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에도 별이는 으레 “놀이터!”라고 외치는 것이다. 이제는 산책이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 된 것이다.  예전 같으면 “안 돼, 집에 가자.”하고 별이를 집으로 데려왔겠지만, 요즘에는 아이 손을 잡고 다시 나간다. 다행히 친정엄마가 함께 육아를  도와주셔서 큰 아이 봄이가 피곤하거나 다른 일을 해야 할 때 봄이를 돌봐주신다. 그래서 마음 놓고 별이와 산책을 다녀올 수 있다. 산책 코스는 처음에는 우리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와 빵집이었다. 매일 같은 빵집에 가는 것도 별이에게 패턴으로 고착될 수 있어, 오늘은 길 건너 다른 아파트 단지의 빵집으로 다녀왔다. 별이는 오늘도 기분 좋게 방방 뛰며 나와 함께 길을 걸었다.

이제는 걷기가 제법 즐거워보이는 별이의 발걸음.


 때로는 내 앞으로 달려 나가기도 하고, 뒤돌아 엄마를 기다리기도 한다. 차가 많은 곳에서는 내 손을 꼭 잡고 함께 걷는다. 도로에서 오토바이라도 지나가면,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견디지 못해 양손으로 귀를 막기도 하지만, 지나가는 버스에게 “안녕, 타요!” 인사도 하고, 빵집에 들러 타요로 장식된 케이크 앞에서 한참을 서 있기도 한다. 산책은 별이에게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나에게도 그렇다. 아들의 손을 잡고, 어딘가 급히 시간에 쫓겨 가는 것이 아니라 두루두루 주위도 둘러보며, 설명도 해주면서 여유 있게 길을 걸은 것이 얼마만인지. 어쩌면 그런 적이 있기는 했나 싶다. 별이의 치료를 시작한 후로, 늘 나는 쫓기듯 마음이 바빴고, 어릴 적 별이가 총알같이 튀어나가던 시절에는 길에서 혹시 아이를 놓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좀 더 큰 이후에도 혹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면 어쩌나, 수업에 늦으면 어쩌나 마음 쓰느라 주위를 돌아보지도, 별이의 표정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아이의 손을 잡고 매일 산책하는 일이 생각보다 나에게도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글을 쓰는 분들 중에 걷기를 실천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나도 작년에 배우 하정우 씨가 썼던 ‘걷는 사람, 하정우’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그 책을 읽을 당시에는,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나로서는 일상 속에서 걷는다는 것은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정우 씨처럼 강남에서 김포공항까지 걸어가는 일정은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비록 걸을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걷고 난 후 집에 돌아와 아이를 돌봐야 하는 것이다. 씻고 바로 잠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1년도 안되어 나는 아이와 함께 걸을 방법을 찾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걷는 즐거움, 걷기의 힘을 나 나름대로의 경로를 통해 발견하게 된 것 같아 기뻤다. 발바닥을 땅에 대고 힘껏 밀어내며 걷는 행위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건강하게 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폭염이 오거나 강추위가 오거나, 폭우, 폭설이 내리지 않는 한 우리의 산책은 계속될 것이다. 좀 더 행동반경을 넓혀서, 봄이 되면 버스 한 두 정거장 거리를 걸어가 보기도 하고, 둘레길이나 고궁도 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 벚꽃이 핀 길을 걸어도 좋고, 청계천이나 중랑천을 따라 걸어도 좋을 것이다. 다행히 내가 사는 서울의 북쪽에는 멀지 않은 곳에 둘러볼 곳이 많다. 숲도 좋고 가로수가 많은 길도 좋다. 도심도 때로는 괜찮다.

 아들과 나는 오랫동안 손을 잡고 세상 속을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다른 아이들보다 독립도 늦을 것이고, 이 아이는 평생 나와 함께, 내가 떠난 뒤에는 아마도 혼자 걷게 될 것이다. 나도 아이도 걷는 것이 즐거우면 좋겠다. 철 따라 꽃도 보고, 사람들도 보며 행복한 걸음을 걷게 되면 좋겠다. 우리는 어차피 평생 걸을 거니까. 내일도 아들과 손을 꼭 잡고 새로운 길을 찾아 걸어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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