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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27. 2019

우리 엄마는 로드 매니저

엄마가 없었다면 나는 아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키웠을까.

 

 나의 오후는 늘 바쁘다. 둘째 아이 별이의 치료 수업은 오후에 몰려 있다. 언어, 인지, 놀이, 감각통합, 그룹, 특수체육을 배우러 다닌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유치원 하원 후 수업이 3개씩이나 있다. 그리고 첫째 봄이도 학원을 여러 개 다니고 있다. 공부 욕심이 많은 봄이는 아직 2학년인데도 영어 학원과 수학 학원에 다니고 있고, 이번 여름방학 동안에는 수학 학원 특강도 신청했다. 그 외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장까지 다닌다. 그야말로 우리 집은 사교육의 정점에 서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아이의 수업 스케줄을 짜는 것은 나의 가장 큰 업무 중의 하나이다. 친정엄마가 바로 옆에 살면서 늘 함께 도와주시는 것이 큰 힘이 된다. 우리 엄마는 운전경력 25년이 넘는 베테랑 드라이버다. 나도 운전을 하지만, 우리는 주로 친정엄마의 차를 타고 이동한다. 운전 실력이 좋은 덕에 이동시간이 훨씬 단축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봄이는 엄마가 하교 후 학원차를 태우거나 등원시키고, 별이는 내 차로 움직이는 시스템이었다. 별이는 아직도 분리불안이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늘 나와 함께 이동해야 한다. 그랬더니 봄이가 엄마를 보지 못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렇잖아도 발달이 느린 동생에게 엄마를 빼앗긴 기분이 드는데 학교에서 돌아와도 엄마를 볼 수 없으니 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한 차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을 택했다. 별이 센터에 갔다가 봄이 학원에 데려다주고, 그 사이에 별이 치료 끝나면 다시 봄이를 데리러 가는 동선이다. 다행히 모든 센터와 학원은 내가 살고 있는 구내에 있고,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10분 이내의 거리이다.    


  예를 들어 월요일인 그저께는 별이의 수업이 3개, 봄이의 학원이 2개 있는 날이었다. 다행히 아직 방학이라 오전에는 여유롭게 집에서 쉬었다.     


오후 1시 30분. 별이 특수체육

오후 2시 30분. 별이 인지

오후 3시 20분. 별이 언어

오후 3시 30분. 봄이 태권도

오후 5시. 봄이 영어학원   

 

이런 스케줄이다. 동선은 더욱더 복잡하다.     

오후 1시. 친정엄마가 우리 집에 오신다.

오후 1시 30분. 친정엄마 차 타고 다 함께 특수체육센터 도착

오후 2시 30분. 다 함께 인지, 언어 교육하는 센터로 이동

오후 3시 20분. 별이와 나는 인지 수업하러 들어가고, 봄이는 친정엄마 차 타고 태권도로 이동

오후 4시 10분. 친정엄마가 별이와 나를 데리러 오심-> 집으로 이동

오후 4시 30분. 봄이 태권도 버스 하차(집 앞에서 버스를 기다려 아이들 픽업)

오후 5시. 다 함께 봄이 영어학원 데려다 줌(학원 버스가 없다)

오후 6시 30분. 다 함께 봄이 영어학원 하원 데리러 감.    

그야말로 그물망 같은 동선이다. 대부분 우리 모두 친정엄마의 차를 타고 함께 이동한다.   

  

 친정엄마는 지난 봄, 무려 2번이나 해외여행에 다녀오셨다. 2주는 유럽에, 1주 한국 체류 후 2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다녀오신 것이다.  엄마가 안 계신 4주 동안 나의 운전실력은 눈부시게 향상되었다. 위와 같은 동선을 소화해내기 위해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주변을 쉴 새 없이 운전해서 이동해야만 했다. 게다가 학기 중이어서 오전 8시부터 두 녀석을 태우고 각자의 학교와 유치원에 등교 및 등원까지 시켰다. 시간에 쫓겨 바삐 운전하다 보니, 어느새 내 운전은 꽤나 난폭해져 있었고, 귀국하신 엄마는 내 차를 타고 깜짝 놀라셨다는 후문이 있다.   

            

 처음 엄마의 해외여행 계획을 전해 들었을 때, 눈앞이 아득해졌다. 자주 해외에 다녀오시기는 하지만, 2주씩 두 번이라니 마음이 심란했다. 그래도 엄마와 나 사이에는 암묵적인 철칙이 있었다. 첫째, 아이들 아빠가 집에 있을 때에는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 엄마의 유일한 숨 쉬는 통로인 해외여행 계획에 토를 달지 않을 것. 더구나 내 돈으로 보내드리지도 못하는 여행, 몸이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친구들과 실컷 가게 해 드려야 한다는 마음을 늘 가지고 살았다. 긴 여행을 다녀온 후 엄마는 훨씬 마음에 여유가 생긴 듯했다. 그리고 나에게 많이 미안해하셨다.    

 

  사실 엄마가 없을 때 몸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그저 항상 긴장하며 지내기는 했다. 어찌 됐든 나 혼자 아이들의 평일의 일상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엄마가 없는 시간 나는 많이 외로웠다. 퇴근시간이 늘 늦은 남편은 평일에 나와 대화를 하거나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남편은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을 씻기고 재우고 나면 자기도 자느라 바빴다. 그동안 내가 조금 특별한 두 아이(봄이는 유달리 예민하고 눈물이 많고, 는 따로 말할 것 없이 여러 모로 특별하다.)를 별 탈 없이 키워냈던 것은 든든한 나의 육아 파트너인 엄마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엄마의 부재 동안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또 엄마와 나는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기에 엄마와 나의 인간관계는 거의 일맥상통하게 통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함께 나눌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8년 전,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한 달 후 봄이가 태어났다. 그때부터 봄이가 백일이 될 때까지 나와 남편은 엄마 집에 살았다. 엄마는 손주와 산모인 나를 돌보느라 슬퍼할 틈이 없었다. 백일이 지나고 우리는 다시 우리의 신혼집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가장 힘들어한 것은 그때였다. 피할 수 없는 슬픔의 시기였다. 둘째 별이를 가졌을 때, 나는 아예 엄마의 집 근처로 이사 왔다. 육아휴직 중이었기에 어느 정도 복직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하지만, 나의 휴직은 예정했던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났고, 결국 퇴직했다. 엄마는 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거의 매일 우리 집에 오셨다. 별이가 어린이집에 등원하게 되자 엄마는 이제부터는 자유시간을 갖겠노라고 선언하셨지만, 별이의 발달지연 판정 이후 치료가 시작되자, 엄마는 자유시간을 포기하고 별이의 치료를 함께 다니거나 봄이를 돌봐주셨다. 아마도 그때, 우리 아이들을 함께 돌보기로 결심하셨던 것 같다.    


  내가 사는 동네는 아기자기한 찻집이나 브런치 집이 몇 군데 있다. 나와 엄마는 아주 가끔 함께 브런치를 먹는다. 별이까지 유치원에 보내고 난 후 오전 동안 찾아오는 짧은 자유시간에 집에서 5분 거리의 브런치 집에 간다. 바쁜 아침 시간, 아이들 등교(등원) 준비로 화장도 안 하고 몰골은 엉망진창이지만, 그 시간 카페에 있는 동네 엄마들의 모습은 대부분 비슷하다. 클럽 샌드위치나 프렌치토스트 등을 주문해 아메리카노와 함께 먹는다. 엄마가 가끔 교회 친구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하나같이 부러워하신다고 한다. “너는 딸내미가 옆에 사니까 같이 우아하게 브런치도 먹고 다니고 진짜 좋겠다.”라고 대놓고 말씀하신다고 한다. 실제로 그다지 근사한 모습은 아닌데 말로 전해 듣기에는 무언가 좋아 보이나 보다. 아니면, 노인 분들 입장에서는 자식과 함께 일상을 보내는 것 자체가 마냥 부러운지도 모르겠다.    


  어떤 친정엄마들은 외손주를 돌봐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또 다른 엄마들은 손주를 돌보느라 세월이 훌쩍 가버렸다고 억울해하시는 것도 많이 보았다. 우리 엄마도 긴 세월 손주들을 돌봐주고 계셔서 그 고마움에 대해서는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다만, 우리 집 같은 경우는 다른 집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는다. 가장 많이 도움을 받는 것은 운전이다. 그리고, 나는 웬만하면 아이 둘을 다 엄마에게 맡기지 않는다. 일단 나는 전업주부이기도 하고, 별이의 분리불안으로 인해 우리 아이 둘을 혼자 다 볼 수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나뿐이기 때문이다. 남편도 둘을 다 맡아보는 것은 버거워한다. 또 하나, 절대로 엄마의 교회 예배 참석과 해외여행을 육아를 핑계로 가로막지 않는다. 그런 원칙들 덕에 아직까지 엄마가 잘 버텨내 주고 계신 듯하다. 몇 년 전 암 수술도 하시고, 여기저기 아픈데도 많아 병원도 여러 가지를 다닌다. 하지만 아이들 재롱을 보며 활짝 웃는 엄마를 보면, 내가 엄마에게 신세 지고 있는 것이 엄마를 힘들게만 하는 것은 아니구나 라고 조금은 위안을 받는다. 아이들을 함께 키우며 함께 브런치를 먹고, 떡볶이를 먹고, 꼬막비빔밥과 곱창구이를 먹어주는 우리 엄마가 있어 참 고맙고 다행스럽다. 무엇보다도 늘 연예인 매니저처럼 바쁘다고 하면서도 시동을 걸고 달려주시는 엄마가 있어 좋다. 언젠가는 내가 엄마의 발이 되어 모시고 다닐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에너지가 엄마에게 부디 오래 남아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이 피우는 재롱이 엄마가 오래도록 웃을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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