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대학에 등록을 하지 않았고 시를 썼다. 내 생각엔 형편없는 시들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지에 실렸고, 이제는 그 시에 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시들을 보관하지 않았고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 마음이 편하다. 난리가 난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가 나를 찾아와 끔찍한 소동을 벌인 것이다. 당신은 그렇게 살겠다는 아들놈에게 낭비할 돈을 보내 줄 바고가 아니라고 했다. 모욕감을 느낀 나는 양심의 가책은 있었지만 의기양양하게 대들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모습을 보여주리라. 나는 철도청 하급 공무원 자리에 구직 원서를 보냈고 놀랍게도 긍정적인 회답을 받았다. -72p.
별을 쳐다보면서 나는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했는지 아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처럼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실제로 세상 끝에 있는 마지막 역이었다. -80p.
가끔 나는 놀랐다.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그렇다. 이것이 인생이다. 하루에 기차 두 대가 오가고, 끊긴 선로에는 풀이 덮이고, 그 바로 뒤에는 병풍 같은 우주가 나타나는 것이. -82p.
참 이상하다.
8년 동안 모범생으로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시를 쓰겠다며 대학에 가지 않는다.
그렇게 쓴 시가 잡지에 실리기까지 했지만, 그는 시를 계속 쓰지도 않는다.
대신 철도청 하급 공무원이 된다.
이 대목을 읽을 때는 사실 별다른 생각 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런데 몇 장 뒤,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으로 독자를 데리고 갔다.
주인공은 병에 걸려 피를 토하고, 어느새 그가 말하는 ‘세상 끝’ 같은 장소에 서서 별을 바라보며 인생을 이야기한다.
11장까지 읽고 다시 9장으로 돌아갔다.
혹시 내가 놓친 사건이 있나? 어떤 큰 계기가 있었나,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나?
하지만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아마도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는 주인공의 심경의 변화뿐이었을 것이다.
그게 다였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큰 사건이 있어서 방향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어떤 시간을 통과한 뒤 문득 뒤돌아보며 놀라게 되는 것이다.
아, 내가 이렇게 살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지.
마흔이 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마흔의 나는 좀 다른 모습일 줄 알았다.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분명한 삶을 살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마흔을 지나 사십 대의 중턱까지 와 있는 지금의 나는 어린 시절 내가 막연히 그려 보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나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후회하거나, 싫어하지도 않는다.
인생은 정교하게 설계된 청사진을 따라 짓는 건축이 아니라, 매일의 발걸음이 무작위로 그려내는 점묘화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진정 나의 인생인가?"라는 생경한 물음 끝에,
비로소 "그래, 이것이 바로 나의 인생이다"라고 낮게 읊조리는 긍정의 마침표를 찍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