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지 않는 감정에 대하여
어떤 기분인가 하면, 글을 쓰고 저장 버튼을 누르지 않고 프로그램을 닫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느낌이다. 최근에 휴대폰을 갤럭시에서 아이폰으로 바꿨는데, 아이클라우드를 사용하라는 끈질긴 알림에 화가 나서 관련된 동기화 버튼을 모조리 해제하다가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이클라우드에 동기화 된 메모를 삭제한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지만, 정확하게 그것은 메모장 자체를 초기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폰은 갤럭시처럼 다시 물어보는 일종의 경고 혹은 사용자를 위한 배려가 부족해서 한 번의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 엄격성을 지닌 기계였고, 나는 모든 메모를 날려 먹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 메모장에는 두 번째 산문집에 대한 프롤로그와 함께 앞으로 글을 쓸 때 가져야 할 방향성이 범박하게나마 스케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회사와 집을 오가면서 틈틈이 써두었던 단상들도 꽤 있었다. 이런 글들을 기반으로 나의 생활 감정의 근간이 발견된다면 이를 요량으로 책을 엮어보겠다는 야심찬 욕망도 가졌던 참이었다. 새해가 되어 선언문마냥 핏대를 세웠던 여러 다짐들(지금은 이미 물건너가고 말았지만)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술을 진탕 마시고 난 다음날의 뼈저린 반성들(지금도 술을 마시고 있지만)도 아득해져 버렸다. 설마설마 하고 메모장 앱을 켜보니 그곳에는 고심하여 만들어 놓았던 폴더들은 죄다 사라지고 메모(0)이라는 폴더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는 사실 써두었던 글들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면 지체없이 그것들을 이 세상에서 소멸시켜버리는 냉정한 작가라고 자칭해 왔던 사람이다. 그런데 실수로 모든 글을 날려 먹었다는 생각을 하니 어째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어이가 없어서 글 쓰는 일을 그만두고 사라져버려야 하나 하는 자책까지 하게 되는 찰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된 김에 글 쓰는 일을 더 적극적으로 해보자! 이건 사실 논리의 비약도 아니고 무논리 그 자체의 생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인데,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데는 한 가지 이유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은 첫 번째 산문집을 내고 난 이후 조금 활동을 하다가 난 다시 잠행의 길을 걸었다. 현실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두 번째 산문집을 영영 낼 수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이 글에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산문집에서 여름과 슬픔,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펼쳐 냈다는 출판사의 서평과 나의 자평은 끊임없이 자부심을 도모하는 일이었지만, 나는 얼마 못가 또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정말 여름을 잘 살았을까? 내가 정말 슬펐을까? 내가 정말 사랑이란 걸 이제는 알까? 이런 질문들이 마음 속에서 봄의 풀밭을 튀어오르는 꽃씨처럼 마구마구 솟구쳤다. 그런 질문들은 곧 강박이라는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고선 내 앞에 당당하게 서는 빚쟁이들이었다. 나는 글을 갚기 위해 열심히 생활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했던 시인들의 삶을 다시금 반추하기도 했고, 한낮이면 평화로운 자태로 밥과 물을 번갈아 먹고 있는 고양이를 막연히 바라보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글 쓰고 시 쓰느라 바쁜 동생들을 굳이 불러내서 술을 먹기도 했고 고이 잠든 애인 옆에서 새벽 내내 시를 읽기도 했다. 그렇게 쫓기듯 쫓기듯 써낸 글이 모이고 모여서 마침내 내가 그간 이야기했던 것들이 요행으로만은 끝나지 않겠구나 확신했던 순간 겨울을 버텨낸 철새무리 마냥 그 글들이 한꺼번에 날아가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더 허망했고 절망스러웠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 써보려 해도 그때 그 감정, 그때 그 온도는 결코 재생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된 거, 눈을 감아보자. 나는 눈을 감고 차오르는 분노를 손으로 감싸보았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절망감은 10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다시 한 번 이렇게 된 거, 하고 말하면서 나는 제대로 써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절망이 희망으로 승화되는 알레고리의 진정한 체현이었다.(이 문장은 아마도 먼 후일 후회하는 문장 TOP3에 꼭 들고 말 것이리라.) 쉽게 말하자면 난 단순한 인간이었다. 쓰는 사람으로 남기로 한 이상, 글 몇 개 날려 먹었다고 더 이상 쓰는 사람이 아니게 될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생활 환경부터 바꾸기로 마음 먹었다. 우선 글을 쓰는 장소를 바꾸었다. 베란다에서 서재로. 휴대폰에서 컴퓨터로. 인스타그램에서 브런치로. 그리고 단상에서 사유로. 이제부터 나의 글쓰기는 진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글쓰기를 잘 해나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해보고 싶다. 안일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충동적으로 써낸 글이 아니라 푹 고아 낸 사골 같은 글을 써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여름과 슬픔과 사랑은 오늘도 몇 번은 호명될 것이고, 잠들 틈 없이 나의 꿈 속을 건너 다니며 행간을 만들어낼 테다.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모조리' Delete 당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은 바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우리 자신(being)이다. 그렇기에 나도 이렇게 더욱 견고해지는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