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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김웅기 Apr 01. 2024

시적 주체라는 말

1.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

0. 시적으로 살고 싶다.


시가 나를 앞설 때였어요. 나는 한참 작아져 있었어요. 비는 오고 너는 간데없고 먹구름을 솜사탕처럼 먹어치우는 오후였어요. 문득 햇빛이 비췄던 것 같았어요. 나도 모르게 들킨 기분이 들어 쓰던 글 위에 바짝 엎드린 채 팔꿈치로 세상을 숨겼어요. 숨겨진 세상은 나를 고마워했을까. 이제 와서 그런 생각, 아무 쓸모없단 걸 알지만 나는 깨달아요. 주체적으로 살고 싶단 말 앞에 혹 같은 시적이란 말 때문에 난 언제나 기피되고 있었단 사실을요.

그런 의미에서 시적 주체라는 말은 김해경이라는 인간을 통과하는 동시에 김웅기의 검열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누구나 이성과 비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흥과 계획. 술과 물. 사랑과 편지. 몸과 정신. 인생은 너무 가파른 굴곡이라서 때론 어떤 곳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모르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양면성에 대해 한 사람은 의지하고 한 사람은 의심하는 진정한 분열증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방금까지 슬펐고 지금은 분명하게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다. 그 간격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시적 주체가 있다. 바람이라 해도 좋다. 시간은 훨씬 탁월한 비유일 것이다. 그 밖에도 랭보나 괴테나 김수영 같은 유령들이 몇 번 기웃거렸고, 호세쿠엘보 같은 싸구려 데킬라가 비처럼 내렸고, 웃기지 마쇼. 생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너는 제발 웃기지나 마쇼.


비주체 혹은 다주체를 논하는 사람과 술을 먹었다. 나는 그날 밤새 토했다. 시적이란 말속에 시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긴 토론이 이어졌지만 우린 결국 적당한 게 좋다는 듯 적당히 먹고 적당히 입 맞추고 적당히 헤어졌었다. 비주체 혹은 다주체에 함의되어 있는 몇 가지 종류의 분열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주체라는 말속에는 ‘하나‘라는 명제가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주체의 사유가 여러 개일 수도 있고 그 여러 개의 사유가 얼마간 여러 개의 주체처럼 보이는 환각을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다면 정말 인공지능에게 모든 권력을 내줄지도 모른다. 갑자기 웬 인공지능이냐고 너는 되물었고 나는 말을 말자 했지만 그때부터 시는 시작되는 거라고 서로를 업신여기다가 헤어졌던 사랑도 있었다.


분명한 사랑들. 그대들에게 내 한 마디 하겠소. 그동안 참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인간은 다 똑같다는 게 문제였다. 다르다가도 털끝만큼이라도 비슷하면 사랑할 구실이 생긴다는 게 문제였다. 나도 사실 혼자 술이나 퍼마시다가 어디서 객사하는 팔자였는데 인간 때문에 연명해 온 것이다. 가끔은 그런 상상을 했다. 비탈진 골목길이었다. 어김없이 비는 내리고 달빛이 희미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15도쯤 기울어진 낡은 전봇대에 몸을 기대고 선 채 나는 생각에 잠겨 있다. 오늘 아침에 은행에서 보았던 아가씨. 그 앞에서 깽판을 치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 검은 정장을 입고 아버지를 말리는 경비들과 그녀의 뒤에서 짠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은행장과 여성 팀장.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야. 언제부터 자기 인생이 기울었던 건지 어떻게 알 거야. 눈물을 꾹 참고 있던 그 아가씨. 그 얼굴 앞으로 휙 하고 비웃듯 지나쳐 간 시적 주체를 보았다. 난 그때 정말이지 시를 경멸하게 되었다. 영감이란 걸 패 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아가씨, 당신은 환해요. 당신은 모자라지 않아요.


1. 김해경 앞에

0. 김웅기 뒤에

2. 위에서 보면 사이에


있다. 그것이 중요하다. 있다는 것. 과감히 말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제 슬픔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도 제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그렇지만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이유는 모두가 다, 이해하지 못할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저를 유심히 보세요. 얇은 막으로 된 얼굴이 몇 겹으로 쌓여 있는지 보세요. 그 사이사이를 어떤 녀석들이 헤집고 다니는지 물론 보세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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