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공장에 팔려가다
S가 학교를 그만둔다고 했다. 겨우 중학교 일 학년이. 왜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내가 반에서 두 번째로 가난했다면 친구네 집은 첫 번째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자그마한 차이가 있다면 그녀의 집은 정부에서 양식과 약간의 생계비가 지급되는 생활보호대상자였고, 우리 집은 영세민(현재 차상위 정도)이라는 점이다. 마을에서 친구네는 가장 가난한 집의 상징이었다. 젊어서부터 천식으로 투병하시는 늙은 아버지, 남동생 셋에 위로 언니 둘, 엄마까지 가난한 집에는 자식도 많았다.
큰언니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입 하나 덜겠다며 동네 땅마지기나 있는 집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갔다. 딱히 월급이라고 정해진 것도 없이 남의 집에서 잔심부름해 주고 밥술이나 얻어먹는 정도였다. 초등학교에 갔다 오는 길에서 보면 열려있는 커다란 나무 대문 사이로 큰언니가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콩을 고르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 마음에도 그 언니가 참 안쓰러웠다.
S는 우리보다 두 살 많은 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 역시 중학교에 다니지 않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산에 신발공장으로 일하러 갔다. 큰언니가 동네 사람 집에 일하다가 부산으로 떠나면서였다. 언니가 일하는 신발공장에 사람이 필요해서 간다고 했다. 아무리 못살아도 중학교는 마치고 가야 한다고 나는 극구 말렸지만 친구 아버지의 결정이라고 했다. 우리 집도 가난했기에 남의 일 같지 않고 마음이 아팠다.
초등학교 때 그녀의 집에 가서 놀기도 하고 또 아무리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그 부모님은 마당에 심어놓은 배추를 쌈으로 밥까지 차려주셨다. 난 가뜩이나 어려운 친구네 집의 양식을 축내는 것 같아 밥을 얻어먹는 것이 죄송했지만, 그 부모님의 인정이 느껴져 맛있게 먹은 적이 있다. S의 집도 우리처럼 자기네 소유의 농토가 없었다. 마당에 있는 텃밭이 전부였다. 우리가 형편이 조금 더 나은 것은 그의 아버지처럼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더 젊은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었다. 담임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S는 학교를 그만두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몇 달 후 S가 고향에 다니러 왔다. 같은 공장에 다니는 언니와 함께였다. 벌써 몇 년 일찍 사회 물을 먹은 언니는 머리를 라면처럼 보글보글하게 펌 하고 뾰족한 구두를 신었다. 파운데이션으로 얼굴은 뽀얗게 입술은 빨간 립스틱 자국이 선명했다. 어린 티가 나면 무시당해 어른스럽게 보이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몇 달 새 달라진 언니의 모습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언니는 키가 무척 작았다. 145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키에 뾰족구두를 신은 언니가 나는 엄지공주와 닮았다고 여겼다.
S는 부산의 한 신발공장에서 재봉사 보조를 한다고 했다. 선임이 잘못 박음질한 실밥을 쪽가위로 푸는 일이라고 했다. 그 단계를 거치면 운동화 밑창에 접착제를 칠하고 붙이는 작업을 하고,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재봉틀을 밟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다. 선임들은 시도 때도 없이 수습생들에게 호통치고 이런저런 심부름으로 혼이 나갈 지경이라고 했다. 신발공장 보조 일도 얘기를 듣고 보니 쉬운 게 아니었다.
둘은 방 한 칸을 얻어 자취한다고 했다. 경제활동을 해서인지 학교 다닐 때보다는 차림새가 말끔했다. 한편으로는 돈을 벌어서 집안에 보태준다니 부럽기도 했다. 그때 우리 집도 별반 다를 바 없이 가난했기에 나도 따라가서 돈을 벌까 얘기를 했다가 아버지한테 된통 혼난 적이 있다. 아버지는 쓸데없는 얘기를 한다며 그 어느 때보다 화를 많이 내셨다. 아버지가 굶어 죽어도 자식들 공부는 시키신다면서 돈이 없으면 땡빚을 내서라도 가르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중학교에 다니며 또래 친구들이 많았던 우리는 자주 어울렸다. S가 부산으로 갔다가 고향으로 올 때면 친구들을 불러 어울리고는 했다. 친구가 사는 모습이 궁금하고 부산이라는 도시에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또한 가난한 집안의 딸이라는 비슷한 처지가 동질감을 느끼게 해 줬다. 잘 산다고 내게 돈을 주는 것도 아니건만 그때는 잘 사는 집 아이들이 은근히 뻐기기도 하고 없는 집 친구를 무시하기도 했다. S는 중학교 때까지는 별로 거리낌이 없었으나 우리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는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S가 보고 싶고 언제나처럼 함께 어울리고 싶어 집에 왔다는 말이 들리면 나는 득달같이 S의 집으로 달려가고는 했다. 처음에 핑계를 댈 때는 다음에는 나오겠거니 했는데 그 일이 반복되자 일부러 피하는 걸 눈치챘다. 그녀에게 우리는 학교와 상관없이 친구지 않냐고 애원하다시피 했으나, 그녀는 갖은 핑계를 대며 친구들을 멀리했다. 그녀는 처음에 다니던 회사는 그만두고 다른 데로 이직한 상태였다. 재봉틀을 잡았고 제법 숙련공이 되어 몸값을 높여 다른 데로 옮겼다는 얘기만 들었다.
그녀는 우리 친구들과는 달리 공부를 일찍 그만둔 데 대한 자격지심이 큰 듯했다. 우리가 모이면 학교 이야기만 하니 고립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우리가 학생이니 관심사가 학교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학생이 학교와 학생과 관련된 얘기를 빼면 별로 할 게 없었다. 우리는 S가 도중에 학업을 그만뒀다고 무시하거나 그런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우리의 소중한 친구였다. 그땐 왜 우리를 피하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만약 그 당사자가 나라고 해도 같았을지 모른다. 우리를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더 자신이 초라해지고 열등의식으로 괴로웠을 것이다.
성인이 된 후 어찌어찌 소식이 닿아 부산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S의 언니는 이미 시집을 가 딸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형부는 아이들 한복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친구는 언니 집에 얹혀살았는데 단칸방 다락이 그녀의 방이었다. 먼지가 내려앉은 온기 없는 방. 변변한 살림살이를 갖추지 못한 신혼 방은 썰렁하고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스물두 살의 언니는 여전히 작은 몸집으로 아기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치 아기가 아기를 양육하는 모습이라고 할까.
언니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둘은 굴속을 기듯 위태로운 계단을 딛고 다락방에 올랐다. 일어설 수도 없고 앉아있어야만 하는 다락방이 답답했지만, 동굴 같은 공간에서 우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고 하루가 저물었다. 이왕이면 좀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잘 살기를 바란 언니의 살림도 옹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하룻밤을 자고 올라오는 데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들의 처지가 별로 나아지지 않았음을 알았기 때문인지 오는 내내 그 다락방이 눈에 밟혔다. 다니던 학교까지 그만두고 돈 벌러 나갔어도 여전히 빈곤하기만 한 그들의 모습에 망연자실해졌다. 가난도 대물림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형편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눈으로 직접 봐서 더 그런 걸까. 나라고 별반 다를 것은 없었지만 비빌 언덕이 전혀 없는 가지지 못한 자의 현실은 암담했다.
70~80년대 부산은 신발산업으로 호황을 맞았다. 몇몇 기업들은 지금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한 곳도 있다. 그렇게 부산의 경제발전과 수출산업에 이바지한 데는 현장 근로자들의 피와 땀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미성숙한 아동이 고사리손을 재봉틀 바늘에 찔리고 선임들에게 욕을 얻어먹으며 기계처럼 몸을 움직였다. 저임금에 열악한 근로환경은 그들을 점점 더 가난이라는 늪으로 내몰았다. 기업은 성장하고 사주는 재벌반열에 올라도 근로자들의 고달픈 삶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해도 아파트 한 채 사기도 힘든 것이 여전한 현실이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속담처럼 배운 것 부족하고, 가진 것 없는 근로자들의 삶은 너무나 팍팍하다.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서민의 모습이다. 우리나라가 고속의 경제성장을 이루고 재벌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데 비해 여전히 하루 먹고살기 급급한 서민들의 명암이 드러난다. 그래서 어쩌면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지 않았을까. 내 친구도, 나도, 또 다른 친구도 개미보다 작은 존재로 열심히 손발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밝은 햇살이 우리를 비출 줄 알았다.
몇 년이 지나 우리는 각자 결혼했고 점점 소식은 뜸해지다 이젠 아예 소식이 끊겼다. 딱 한 번 통화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사는지 물어보니 단칸방에 세 들어 아들 하나를 낳고 산다고 했다. 그나마 나는 아파트를 자가로 소유하고 살았는데 삶의 질은 큰 차이가 나지 않았음에도 그녀가 벗어날 수 없는 그 가난에 대해 막막함을 느꼈다. 연락을 주고받기로 했으나 어쩐 일인지 통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 고향 가는 길 친구의 언니네가 면 소재지 가게 앞에 있는 모습을 차를 타고 지나며 잠깐 스쳤을 뿐이다.
그녀의 삶이나 내 삶이나 오십 보, 백 보이거늘 나는 왜 그녀를 그토록 안쓰러워한 걸까. 먹고사는 거야 비슷하지만 그건 아마도 그녀가 학업을 마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의 발로였을 것이다. 학벌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기본교윸은 인간이 마땅히 누릴 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똑같이 하층민으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그 부모님도 어린 자식을 신발공장에 보내고 싶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녀도 가난한 집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부모님도 그녀의 잘못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우연히 그런 역할이 맡겨졌을 뿐이었다. 순하고 착한 친구, 어쩌다 생각이 날 때면 그녀의 행복을 가만히 빌어준다. 어릴 때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 만나 보고픈 친구, 지금도 부산 땅 어디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