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할아버지네

차멀미로 남은 서울행

by 글마루

초등2학년 겨울방학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언니와 나를 데리고 서울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자고 하셨다. 엄마는 시장에서 큰맘 먹고 밤색 골댄 바지를 사 오셨다. 근데 치수가 너무 커 내의를 입고도 바지가 줄줄 내려갔다. 허리띠도 없고 마침 친척집에서 얻어온 어른 넥타이로 허리띠를 대신했다. 넥타이로 허리띠를 하는 게 어색해서 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애들이 클 것을 예상해 어쩌다 옷을 살 때면 주먹 두 개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큰 바지를 샀기에 포대자루 입은 듯 후줄근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재 너머 양지리에서 버스를 탔다. 서울까지 거리가 꽤 먼 데다가 교통시설도 발달하지 않은 70년대라 새벽밥을 먹고 나섰다. 양지리에는 우리 마을보다 더 깊숙이 1km는 더 들어가는 안쪽 동네인데도 이발소가 있었다. 아버지와 우리는 이발소 난로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이발사는 흔쾌히 우리를 난로 앞에 안내했고 아버지와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았다. 옛날에는 농촌의 가구가 꽤 많기도 했고, 양지리에는 초등학교가 있어서인지 구멍가게도 두 군데 있었다.


버스를 타고 황간까지 가는데 난생처음 타보는 버스의 연기가 역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도 아파왔다.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그 자리에서 토했다. 나보다 몸이 튼튼한 편인 언니는 비교적 잘 버텼다. 난 원체 젖배를 곯은 데다가 제대로 못 먹고 자라서 무척 마르고 약했다. 아버지는 기사아저씨께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기사아저씨는 바닥에 토하지 않았으면 자기가 먹어도 되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또다시 영동 가는 버스 안에서 구토를 했고, 역시 기사아저씨는 싫은 내색 한 번 안 하셨다. 그땐 인심이 후해서 그랬는지 기사아저씨가 마음이 좋아서인지 정색하기보다 멀미로 고생하는 나를 걱정하느라 바빴다.


난 멀미에 너무 시달려서 거의 졸도직전이었다. 서울이고 뭐고 안 가도 좋으니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서울까지 가는 여정은 멀고도 험난했다. 영동에서 기차를 타고 기차에서도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느라 나는 아버지 무릎에 죽은 듯이 엎드려 갔다. 고대했던 서울행 이건만 차멀미에 시달리느라 서울은 신세계가 아닌 지옥의 관문 같았다. 드디어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그런데 거기서 또 택시를 타고 가야 된다고 했다. 영등포역 앞은 여러 대의 버스와 줄을 이은 택시 배기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으로 인해 나는 길에서도 멀미를 했다. 계속 속은 울렁거리고 거의 실신상태까지 빠졌던 나는 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서 가자고 졸랐다. 아버지는 너무 멀어서 힘들다고 하셨고, 결국 택시를 타고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차멀미로 먹은 것을 다 게워내고 또 하나도 먹은 게 없어서 먹고 자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차멀미 다음으로 나를 괴롭히는 게 있었으니 바로 수돗물이다. 시골과는 다른 수돗물에서 나는 불소 냄새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예민한 내겐 밥에서도 그 냄새가 났다. 밥을 못 먹자 라면을 끓여주셨지만 역시 똑같았다. 촌수가 할머니뻘이고 실제 나이는 엄마와 비슷한 서울 할머니는 안절부절못하셨다.


사실 말이 할아버지, 할머니이지 연세는 아버지보다 연하셨다. 먼 친척에 항렬이 낮다 보니 아버지가 조카뻘 되고 할아버지가 아저씨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두 살 위였지만 아버지는 늘 서울할아버지께 깍듯이 ‘아저씨’ 라며 존댓말을 하셨고, 서울 할아버지는 아버지께 진짜 조카한테 말하듯이 대하셨다. 어릴 땐 둘도 없는 죽마고우로 자라셨던 두 분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주 왕래했다.


주로 서울 할아버지가 시골로 내려오셨다. 오시면 친척들이 많으니 며칠씩 묵어가셨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 집에 오시면 다른 자매는 빼고 나만 용돈을 주셨다. 70년대에 천 원은 좀 큰돈이었는데 오실 때마다 나를 예쁘다고 안아주시고 귀여워해주셨다. 세 자매 중 혼자서만 귀여움을 독차지한 나는 제법 우쭐대기도 했다. 물론 받은 용돈은 그대로 엄마에게 바쳐야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성공한 부자로 소문났지만, 서울 할아버지네는 생각처럼 큰 부자는 아니었다. 70년대 영등포동은 좁은 골목이 이어졌고 판잣집처럼 서글펐다. 화장실도 몇 가구가 같이 사용했고 중간 통로 양쪽으로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블록으로 쌓은 방이 여러 개 있었는데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방 한 칸에 부엌은 밖에 있었는데 방은 매우 컸고 따뜻했다. 오막살이 시골 초가집보다는 넓었지만 개발이 덜 된 서울도 번화가만 높은 건물이 있을 뿐 골목은 좁고 정비가 되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수돗물 냄새는 여전했다. 전혀 한술도 뜨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못 먹고 누워만 있었다. 수돗물에서도 불소 냄새가 났기에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었는데도 화장실만 들락거렸다. 그러자 훈이가 누워있는 나를 보고 "맨날 오줌만 싸는 거야?"라며 다정하게 말했는데 말투에서 나를 몹시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서울 할머니는 내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잡고 배를 어루만져주며 따뜻하게 보살펴주셨다. 서울 구경하려고 간 것이 졸지에 환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서울 할아버지의 아들 셋 중 훈이, 원이, 짠이가 있었다. 원래 호적에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애칭처럼 부르는 것이었다. 훈이는 며칠 동안 차멀미로 골골거리는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며칠이 지나니까 조금 기운도 차려갔다. 골목 밖으로 삼 형제, 언니와 나가서 놀기도 하고 서울의 상점도 구경했다. 시골에서는 해만 지면 잠이 들었는데 우린 밤 10시까지 졸린 눈을 비비며 상점가를 돌아다녔다.


상점에는 밤늦도록 불이 켜졌고 나는 난생처음 보는 전파사와 맛 보기 힘든 감귤이 탐스러운 과일가게를 유심히 바라보고는 했다. 한눈에 봐도 우리가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라는 게 눈에 확연했고 가게 주인은 우리 자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의 장점은 뭐든 빨리 잊어버린다. 지독하게 했던 멀미도 금방 잊고 아이들과 밤늦도록 골목길을 배회했다. 훈이, 원이, 짠이와는 남매처럼 붙어 다녔다.


맏이인 훈이는 너그럽고 착했다. 둘째인 원이는 좀 갸름한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짠이는 워낙 어려서 잘 웃는 게 마냥 귀여웠다. 그중 나이가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원이와 이따금씩 옥신각신 했다. 장난기가 많으니 자꾸 내게 말을 걸었고 귀찮게 해서 나는 성가셨다. 걔들은 안방이고 난 군식구니까 기싸움에서 내가 밀렸다. 결국 짓궂은 원이에게 "너 진짜 너무 한다"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어른들은 내 얘기가 너무 웃겼는지 파안대소하셨다. 어른들이 원이를 나무랐고 그 말이 먹혔는지 원이는 더 이상 짓궂게 대하지 않았다.


시골에서 촌놈들이 올라왔다고 어린이대공원 나들이를 간다고 했다. 서울 할머니는 아침부터 먹을 것을 챙기셨다. 계란도 많이 삶고 귤 등 과일도 한 보따리 준비하셨다. 택시는 두 대로 나눠서 출발했다. 우린 차멀미로 고생을 하고도 어린이대공원 나들이로 들떴다. 이젠 차멀미를 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택시에 올랐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또 멀미를 했다. 이번에는 언니도 토하기 시작했다. 결국 어린이대공원 행을 포기하고 돌아와야 했다. 공원 가려다 애 잡기 십상이었기에 어른들의 안타까움은 무척이나 컸다.


시골에서 서울까지 와서 남들 다 가는 어린이대공원도 못 가고 특히나 나들이로 한껏 부풀었던 훈이네 삼 형제의 불만이 폭발했다. 원이는 그렇게 자동차도 못 탈 거면 시골로 내려가라고 했다. 그런 원이를 어른들이 나무라셨다. 대신에 훈이네는 영화 관람권을 얻어냈다. 다음날 우리는 온 가족들이 구로동에 있는 극장에 갔다. 제목은 ‘독수리 오 형제’라는 만화영화였다. 극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꽉 찼다. 좌석은 엄두도 못 내고 서서 봐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키가 작으니까 그것마저도 힘들었다. 결국 서성거리다가 멀리서 만화영화를 보긴 했다. 독수리 오 형제가 날아다니는 광경을 나는 넋을 잃고 바라봤다. 어른들은 애들 잃어버릴까 봐 영화는 보는 둥 마는 둥했다. 좌석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어쨌든 난생처음으로 극장을 갔고 영화를 본 것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다른 친척집도 방문하면서 서울에 머물렀다. 시골로 돌아오기 전날 서울 할머니는 언니와 나를 옷가게에 데려가셨다. 거기에서 빨간 털이 송송한 예쁜 겨울점퍼를 사주셨다. 세 자매라고 동생 것까지 챙겨서 세 벌이나 사주셨다. 옷가게 주인은 친조카냐고 물었고 서울할머니는 아니라고 하니 친조카도 아닌데 웬 옷을 세 벌씩이냐 사주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울할머니는 먼 친척인데 남자들끼리 형제처럼 친한 데다 시골에서 메주며 양념이며 보내준다며 잘해줘야 한다고 하자 가게 주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난 모자까지 달린 예쁜 점퍼를 입고 공주가 된 것처럼 신났었다.


서울 할머니와 훈이는 내가 멀미와 수돗물 냄새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얼굴이 핼쑥하자 무척 걱정을 하며 안쓰러워했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을 안고 다시 시골로 오는 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 할머니는 다음에 또 놀러 오라는 말을 잊지 않았고 훈이는 헤어짐을 무척 아쉬워했다. 여름방학 때 시골에 놀러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우린 정든 훈이네 형제들과 이별했다. 내려오는 길 역시 또다시 반복되는 멀미와의 전쟁을 치렀지만 난생처음 서울나들이를 해본 나는 의기양양해 동네 아이들에게 서울 가서 구경한 이야기를 자랑처럼 늘어놓았다.


이듬해 여름방학에 훈이네 삼 형제는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서울 할머니는 내려오지 않고 할아버지가 아이들만 데리고 온 것이다. 며칠 동안 삼 형제들과 우리 세 자매는 들로 냇가로 같이 쏘다녔다. 삶은 옥수수를 나눠먹고 모기에 뜯겨도 즐거웠다. 이미 한 번 어울린 적이 있는지라 허물이 없어졌다. 엄마는 짓궂은 남자형제 셋에 우리까지 뒤치다꺼리로 힘이 드니 불만을 드러내셨지만 우린 아랑곳하지 않았다. 훈이는 맏이라서 그런지 성품이 순하고 의젓했다. 언니와도 친하게 지냈는데 나중에 자라서는 연락이 두절되었지만 한참 동안 우리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우린 딸만 셋, 그 집은 아들만 셋이었다. 딸을 원하셨던 서울할아버지는 제일 예뻐하는 나와 당신 아들을 바꿔서 키우자고 여러 번 제안하셨다. 말이 쉽지 부모님이 망설이시니 나중에는 나만 데려다 키워서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하셨지만 난 거절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어서였다. 엄마는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는 듯했는데 나는 아무리 부잣집이어도 엄마, 아버지와 헤어져 남의 집에 가서 사는 게 싫다며 울먹였다. 만약 자식을 바꿨다가는 나는 죽어버리겠다며,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울먹이며 엄마에게 다짐을 받았다. 아무리 부잣집에 대학까지 보내준다고 해도 부모님과 헤어진다는 것은 세상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린 마음에 정말로 남의 집 양녀로 보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서울 할아버지는 설비 기술자였는데 나중에는 돈을 벌어 집도 사고 재산도 좀 모았다. 이후 서울 할머니와 시골에 다녀갈 때면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었고 할머니 또한 크고 서글서글한 눈에 제법 사모님 티가 났다. 중학생이 되어 다시 만나자는 훈이네와는 딱 한 번 시골에 와서 잠시 얼굴만 볼 수 있었다. 몇 년의 공백에다 많이 자란 우리는 어색함을 느꼈고 전처럼 허물없이 다가가지 못했다. 마음은 변함없는데 쑥스러움과 어색함으로 다가서지 못한 것이다. 훈이네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졌다.


아버지와 서울할아버지는 친한 만큼 아픈 것도 닮는 것인지 모두 암으로 세상을 달리하셨다.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시기 전 투병 중인 아버지를 병문안 오셔서 서울 할아버지는 몹시 눈물을 흘렸다는 것과 기다렸다는 듯 위암이 찾아왔다. 수술 후 몇 년 더 살던 할아버지도 머지않아 세상을 떠났다. 두 어른들이 돌아가시자 연결고리가 없어진 두 집안은 자연스레 소식까지 멀어지게 되었다.


훈이와는 편지도 오고 갔지만 사춘기 이후로는 연락이 끊겼다. 얼마나 자랐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지고 훈이도 궁금해한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본 적이 없다. 어른들이 전해주시는 소식만 간간이 들을 뿐이었다. 멀미로 지쳐있는 내게 서울 할머니는 엄마 같은 손길로 배도 만져주시고 친딸처럼 대해주셨다. 내 병간호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내 옆에 누워 보살펴주셨다. 지금도 또렷한 서글서글한 서울 할머니의 눈빛이 눈에 선연하다. 할머니도 가끔 우리 자매를 떠올리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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