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도시와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배우 박지환에게 유퀴즈의 MC 유재석이 무명 배우의 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물었습니다.
“돈하고 무관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연기를 너무 좋아하니까 아르바이트하며 연기를 하는 게 너무 당연하고 행복했어요. 연기만 나한테서 앗아가지 않으면 평생 돈 없이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이 사람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바보일까요? 아니면 자본주의를 이용해 거짓말을 하는 천재 연기자일까요? 돈과 상관없이 행복하다는 대답을 하는 화면 속의 그는 연기자도, 바보도 아닌 행복한 사람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책 <커먼즈란 무엇인가?>의 한디디 작가는 인류의 역사를 24시간으로 환산한다면 자본주의의 역사는 4초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나머지 23시간 59분 56초는 돈하고 무관하게 지낸 것이 인류입니다. 배우 박지환뿐만 아니라 인류는 대부분 돈과 무관한 시간을 보냈고, 저 또한 얼마 전 돈과 무관하게 충만한 행복감을 느낀 일이 있었습니다.
동네 도서관에 들러 책을 대출하고 나오는 길에 ‘우리가 작곡 프로젝트’ 란 포스터가 눈에 띄었습니다. 6주간 나만의 노래를 만들어 녹음까지 완성한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취지였습니다. 악보는 당연히 볼 줄 모르고, 박자 감각도 없지만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남의 일이라 여기고 도서관 문을 나서 지하철역을 향해 다시 걸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는 내내 나 만의 노래를 만들어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스스로에게 한 다짐을 떠 올렸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더 이상 버킷리스트에 담지 말고, 그냥 하자.’
밥을 먹다 말고 정원이 5명인 ‘우리가 작곡 프로젝트’에 신청했습니다. 내가 클릭한 것이 동네 도서관의 평범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환상적인 음악여행의 티켓일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음악선생님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 같았습니다.
“6주라는 시간은 작곡이론을 배우기에도 모자란 시간입니다. 선생님들이 노래에 담고 싶은 이야기를 에세이 형식으로 먼저 저에게 보내주세요. 그 이야기가 가사가 될 겁니다. 그리고 틈 날 때마다 떠오르는 멜로디를 흥얼거린 후, 저에게 녹음파일로 보내주시면 제가 코드를 따고 악보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수업 전개 방식이었고, 과연 이렇게 해서 노래가 될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키팅 선생님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나는 가사에 25년의 직장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심경을 담기로 했습니다. 오십 년을 남을 따라 살았으니, 제2의 인생은 남들과 다르게 살아보겠노라는 의지를 담아 ‘날개 달린 물고기’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수업이 진행되며 가사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은지 선생님이 질문하자 놀라운 이야기들이 쏟아졌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가족에게 모질게 대한 자신을 자책하는 이, 육아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이, 엄마가 되길 갈망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슬픔에 잠긴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조심스럽게 꺼낼 때마다 우리는 함께 눈물을 흘렸고, 음악 수업과 철학 수업을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희로애락을 가사에 담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사 작업은 순조로웠지만 문제는 역시 멜로디였습니다. 그리고 어둠 속을 헤매던 우리에게 해답을 준이는 키팅 선생님이었습니다.
“발라드, 재즈, 댄스 어떤 장르건 좋습니다. 평소 좋아하는 노래를 모티브 삼아 그저 흥얼거려 보세요. 자신만의 멜로디가 떠오를 겁니다. 그리고 공원을 산책하거나 새로운 장소에서 흥얼거리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날부터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과 공일오비의 이젠 안녕을 모티브 삼아 시도 때도 흥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디서 들어본 듯하지만, 나만의 멜로디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방 안에서, 밥을 먹다가도, 산책을 하다가도 멜로디가 떠오르면 흥얼거렸고, 나의 멜로디를 저장했습니다. 제주도 여행 도중에는 음악여행을 떠난 작곡가처럼 내가 쓴 가사에 멜로디를 덧입히며 음악의 모양새를 갖춰나가기 시작했습니다.
3주 차부터 각자 만든 멜로디와 가사에 대한 키팅 선생님의 칭찬 폭격이 시작됐습니다. 선생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어설픈 노래를 보듬어주고 다듬어 주며,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먹방 유튜버들이 맛 표현이 가장 힘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칭찬도 천편일률적이면 립 서비스처럼 들리기 마련입니다. 키팅 선생님은 우리의 가사와 멜로디를 세심히 읽고 들은 후, 각자에 맞는 칭찬을 매번 들려주었습니다. 돌아보니 그가 돌본 것은 어쩌면 우리의 노래가 아니라 우리의 지친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쉽게 설명해 달라는 지인의 물음에 데이트를 할 때는 시간이 빨리 가지만,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가지. 그게 상대성이론이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나의 노래를 만드는 행복한 시간도 랩처럼 빨리 지나갔습니다. 마지막 수업은 대망의 녹음이었습니다. 한 사람당 한 시간이 배정되었지만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녹음은 7시가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우리는 달뜬 마음과 지친 몸을 이끌고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대견함을 격려하고, 각자의 노래를 궁금해하며 다시 만날 날을 약속했습니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으로 동네 도서관에 작곡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나고 왔습니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이 수업은 수익성면에서 그야말로 무익한 프로젝트입니다. 참석자 누구도 자신이 만든 노래로 수익을 기대하지 않으며, 노래를 만드는 과정은 효율성 측면에서도 시간 낭비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것은 보이지 않는 행복감뿐이었습니다.
인간은 돈의 노예가 아닌 유희의 동물입니다.
등정의 대가로 장애를 얻고도 들뜬 마음을 감춘 채 다시 집을 나서는 탐험가. 진통제를 삼키고 파스를 안전장치 마냥 온몸에 붙인 채, 미소를 띠며 바다로 향하는 해녀. 돈이 없어도 연기만 할 수 있다면 행복하다는 배우, 돈도 되지 않는 음악 수업을 듣는 어른들이 그 증거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은 이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좋아하는 무언가를 끝내 찾지 못하고 안전하게 죽는 이들입니다.
<덧붙이는 영화>
음악영화 좋아하세요?
2016년 개봉한 ‘싱 스트리트’는 더블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청춘들의 음악영화처럼 보이지만 저는 행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미생들의 어드벤처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미지의 섬 네버랜드에 닿기를 꿈꾸는 이라면 답을 얻을 수 있는 영화라 덧붙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