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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완 Oct 01. 2024

세한도의 여정

 소나무 한그루와 잣나무 세 그루 그리고 허름한 집 한 채가 그려져 있는 세한도가 국보 180호로 지정된 것은 추사의 뛰어난 그림 실력 외에도 역사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래 그림의 크기는 가로 69센티 세로 23센티였으나 세한도는 추사의 손을 떠난 후 전체 길이가 무려 14미터에 이르게 되었다. 생활이 곤궁하여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종이를 이어 붙여 그린 그림 세한도가 청나라와 일본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되는 여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이다.

 명작의 탄생은 추사 김정희의 고난에서 비롯되었다. 금석화의 대가이자 추사체의 창조자인 김정희는 55세에 제주도 유배 길에 올랐다. 물설고 바람까지 거센 낯선 섬, 고립된 섬 안에서도 가시울타리를 두른 집안에서 갇혀 지내야 하는 위리안치는 최악의 유배형이었다. 손에 물 한 번 묻혀본 적이 없던 늙은 선비는 음식은 물론이고 옷도 스스로 지어 입어야 했다. 생활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정치가 어지러우니 권력자의 눈치를 보느라 죄인 아닌 죄인과의 인연을 이어가려는 이는 없었다. 


 “부인 먹고 자는 것은 어떻소? 그동안 무슨 약을 먹었소?” 

 자신의 처지보다 병중에 있던 부인을 염려하는 그의 서신은 기가 막히게도 부인이 죽은 날 물은 마지막 안부가 되고 말았다. 한참 후에야 부인의 부고를 접한 추사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런 김정희를 찾는 이가 있었다. 그는 김정희의 제자이자 중국을 12번이나 다녀온 역관 이상적이었다. 이상적은 중인이지만 학식이 높았고, 세태에 따라 마음이 달라지는 사대부보다 고매한 심성을 가진 자였다.  

 “스승님! 자주 찾아뵙지 못하여 송구스럽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황조경세문 편을 구해왔습니다.”

 “아니 돈을 주고도 사기 어렵다는 이 귀한 책을 어찌 늙은 죄인에게 준단 말인가. 자네도 참 출세하는 방법을 모르는구먼. 허허허. 고맙네. 참으로 고마워”

 역관 이상적은 청나라의 문인들이 그의 글을 모아 은송당집이라는 책을 제작해 줄 정도로 청의 지식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제가 이 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에서 스승님의 명성 덕분입니다. 많은 이들이 스승님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사오니 부디 잘 견디셔야 합니다.”

 “고맙네. 내 비록 어렵지만 자네 덕에 이렇게 잘 버티고 있어. 자네도 항상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시게나. 아니지! 이제는 오지 말게. 자네에게 화가 미칠까 봐 두렵네.”


 이상적이 다녀간 후 마음이 헛헛해진 추사는 제자의 마음에 보은 하기로 결심했다.

 “작년에는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를 보내주더니 이번에도 또……. 가만있자. 우선(이상적의 호)을 위해 무엇을 해주면 좋을까? 아무래도 직접적인 글보다는 이번에는 그림이 좋겠어.”

 추사는 어렵게 구한 종이를 이어 붙여 제자 이상적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에 이상적을 직접 언급함은 물론이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감사의 마음을 담기까지 했다.

 “우선(이상적의 호) 보시게!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고 했네.” 

 세한도의 초라한 집은 추사가 유배되었던 장소이고, 변하지 않는 소나무는 이상적의 늘 푸른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어디 보자! 바람이 차서 손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나 이해해 주겠지? 그나저나 우선이 이 그림을 좋아해야 할 텐데. 언제 또 오려나?'

 추사가 청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마음이 일어나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려주었다면 이를 반기지 않을 이가 세상 천하에 어디 있겠는가? 이상적은 당연히 세한도를 좋아하였고, 그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는 추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려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그림을 연경으로 가져가서 장황을 한 다음(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족자로 만드는 작업) 친구들에게 구경시키고 제영을 부탁할까 합니다.”

 추사의 세한도가 제주에서 출발하여 청나라로 가게 된 연유이다. 

 청나라는 물론이고 당대 동아사이에서 명성이 드높았던 추사의 세한도는 북경의 문인들에게도 큰 화제가 되었다. 이상적이 세한도를 가지고 입국하자 청나라 문인들이 연회를 베풀어 주었고, 그 자리에 모인 16인의 청나라 문인들이 세한도에 시문을 덧붙였다. 세한도의 길이가 14미터에 이르게 된 연유이다.

 “추사의 글씨에 대해서는 두 말하면 잔소리지만, 그림도 참으로 좋습니다.”

 “가만있어 보시오. 이것은 전설 속의 그 초묵법이 아니오? 추사는 도대체 어디서 이것을 배웠단 말이요? 우선은 알고 있소?”

 “스승님께서 열 개가 넘는 벼루를 구멍 내고 천 개가 넘는 붓을 닳게 하여 추사체를 완성하신 것은 다들 아시지요? 맥이 끓어져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 이 초묵법도 삼십 년간 스스로 수련하신 끝에 도달하신 결과입니다.” 

 초묵법은 먹을 진하게 갈아 물기를 없앤 상태에서 오직 붓의 속도로만 농담을 표현하는 고도의 기법이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의 마스터피스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를 비롯한 여러 인물에게 전해지다 세상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아직도 세한도를 누가 모시고 있는지 모르나?"

 "시국이 이 모양이니. 벌써 일본으로 넘어간 건 아닌지 모르겠어."

 세한도가 다시 세상에 나온 건 1931년이었고, 경매에 나온 세한도를 낙찰받은 인물은 일본인 후지츠카 치카시였다. 1926년부터 경성제국대학의 동양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그는 추사의 진가를 알아보고 완전히 매료되었다. 

 "추사의 나라는 사라졌지만, 선생님의 예술은 내가 이어야겠다."

 그는 조선에 머무는 17년 동안 추사연구는 물론이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추사에 관한 모든 것을 모으는데 열성을 다했다. 그 결과 최고의 추사 전문가는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 후지츠카가 되었다. 그는 도굴범이나 문화재를 약탈하는 무뢰한과는 달랐다. 추사의 모든 것을 사랑했으며, 세한도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1939년, 그는 환갑을 맞아 지인들을 위한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세한도를 세상 모두와 나누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세한도 영인본 100부를 나눕니다."

 그러나 그는 이 땅에 세한도 영인본만 남겨두고 원작 세한도를 품에 고이 안은 채 일본으로 돌아갔다. 세한도가 일본으로 가게 된 연유이다.

 1944년, 당시 42세였던 조선 최고의 서예가 손재형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오기로 결심했다. 손재형은 서예라는 말을 탄생시켰으며, 이건희 이전 겸제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보유했을 정도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높았던 인물이다.

"추사 선생님의 세한도가 일본에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한도를 다시 모시고 오리라."

 일본으로 건너간 손재형은 후지츠카의 집 인근에서 머물며, 수시로 그의 집을 찾았다.

 "돈은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드리겠소이다. 보유하고 있는 모든 장서가 아니라면 세한도만이라도 돌려주십시오."

 후지츠카는 손재형의 제안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매일같이 자신을 찾는 손재형에게서 젊은 날 추사를 향한 자신의 열정과 진심을 보며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선생의 추사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한도는 태어난 땅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도 세한도가 일본에서 온전히 보관되고 여전히 존경받을 거라 여기십니까? 선생만큼 추사를 존경하고 세한도를 아끼는 제가 잘 모시게 해 주십시오."

 "내가 젊은 당신에게 졌소. 그리고 돈은 필요 없소이다. 부디 세한도와 추사의 예술을 잘 지켜주시오."

 일본에서의 폭격을 피하고 고국의 독립을 맞이한 손재형은 독립선언문 33인 중 이시영과 오세창, 정인보 선생을 찾아갔다. 초대부통령인 이시영, 구한말 최고의 서예가였던 오세창, 역사학자였던 정인보는 세한도를 보고 크게 감격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세 분께서 여기 세한도에 글을 남겨주십시오."

 "나라는 우리 모두가 함께 되찾았으나 세한도를 되찾아 온 것은 당신이구려. 참으로 고생하셨소."

 "선생님들이 하신 고생에 비하면 제가 한 일은 고생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 아닌 누구라도 했을 것이고, 어느 때라도 세한도는 반드시 돌아왔을 것입니다." 

 친구의 변하지 않는 우정을 위해 그려진 세한도에 광복이라는 역사가 보태지는 순간이었다. 

 세한도의 기묘한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세한도가 위태로웠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유랑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된 것은 손세기 손창근 부자에 의해서이다. 

 1903년 개성에서 태어난 손세기는 인삼재배와 무역업을 하고 있었다. 개성상인답게 전쟁 가능성을 미리 감지한 그는 야밤을 틈타 인삼밭의 남은 인삼을 트럭에 싣고 남하했다. 인삼이 밑천이 되어주긴 했으나 전쟁 후의 삶은 공평하게 고달팠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그의 장남 손창근이 아버지의 사업에 가세하기 전까지 곤궁한 생활을 견뎌야 했다. 잠을 자기 위해 대각선으로 누워야 했고, 빗물로 빨래를 하던 시절을 뚫고 사업은 번창해 갔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두 부자는 한국의 문화재를 모으기 시작했고, 아버지 손세기 씨는 칠순을 맞아 정선, 김홍도 등의 그림 200점을 서강대에 기증하였다. 박물관도 없던 서강대는 그들의 기증으로 박물관을 만들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아들 손창근의 대가 없는 기부는 평생을 걸쳐 이어졌다.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1억 원 기부, 2012년 식목일을 맞아 남산 2배 면적의 임야를 산림청에 기증했다. 이 임야는 용인 석포숲 공원으로 시민의 품에 안기게 되었는데, 민간 건설사를 비롯한 많은 곳의 매매요구를 뿌리치고 무상으로 기증하였다. 50년간 사비를 들여 심은 나무는 덤이었다. 기부당시 신상공개를 원하지 않아 산림청 직원들은 그의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자식들도 흔쾌히 동의했다는 사실만 대리인을 통해 전달했다.

 평생을 근검절약하며 살며 칠순잔치도 하지 않은 그는 88살 미수연을 맞아 연고도 없던 카이스트에 50억 원 상당의 부동산과 현금을 기부하더니, 아흔이 되던 2018년에는 세 명의 자식들 집에 보관 중이던 작품까지 회수하여 300점이 넘는 우리 문화재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중하였다. 이때 『용비어천가』 초간본(1447)과 추사의 또 다른 난초 걸작 '불이선란도'까지 포함되었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은 '손세기 손창근 특별전'을 개최하며 예우를 다하였다.

 문화재 기부 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그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작품이 추사의 세한도이다. 오랜 시간 예술품을 수집한 당대 최고의 심미안을 가진 그의 눈에도 최고의 작품은 세한도였던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니라 설사 추사가 환생한다 해도 그에게 세한도를 기부하라고 강요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전쟁의 포화를 함께 뚫고 평생을 걸쳐 모든 것을 함께 일군 부인 김연순 여사의 한 마디였다.

 "땅이고 돈이고 다 나눠 주는 걸 좋아하시는 양반이 세한도는 도저히 못 놓겠어요? 나 주세요. 나는 줄 수 있잖아요."

 "당신이 뭐 하려고?"

 "내가 기부하려고요!"

 2020년 12월 9일, 손창근 옹이 세한도마저 끝내 기부하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문화유산 보호유공자에 대한 포상을 시작한 이래 최초로 금관문화훈장을 그에게 수여하였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어느 기부 행사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는 자식들의 간곡한 부탁에 청와대 행사에는 참석했다고 한다. 

 세한도를 떠나보낸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쉬움이나 헛헛함 뿌듯함 등의 한 가지 마음으로 설명이 불가능할 것이다. 세한도를 국가에 기증한 그는 2024년 6월 11일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것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의 이름을 건 특별전까지 열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다 그의 차남 손성규 연세대 교수의 말을 전해 듣고 더욱 놀라고 말았다.

 "아버지께서 특히 박물관과 산림청에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저희는 자식 된 도리로 고인의 뜻에 따라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렀습니다."

 그저 그 할아버지에 아버지에 아들이다라는 말로 존경의 마음을 표할 수밖에 없다. 같은 해 7월 아침이슬이라는 무형의 예술품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난 김민기 선생의 유족들 또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부의금을 거절한 바 있다.


 팔아먹을 수만 있다면 그림이 아니라 나라까지 팔아먹으려는 금수만도 못한 인간들의 탐욕을 세한도라는 명작을 만들고 지킨 분들이 중화시키며 세상이 정화되는 것이 아닐까?

 세한도는 세태에 따라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 이상적의 마음과 그런 마음에 감사할 줄 아는 추사의 마음이 더해져 위대한 예술이 되었고, 돈과 상관없이 예술을 지키려는 바보 같은 이들의 선한 마음이 더해져 위대함이 점점 더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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