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이 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 설을 등에 업고, 고려 우왕을 폐위시킨 뒤 조선을 건국하였다. 세월이 흘러 조선의 위정자들이 백성을 위하는 대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정치를 펼치자 한 예언서가 조선을 뒤흔든다.
“진인 정 도령이 나타나 조선을 멸망시키고, 새 나라를 세울 것이다.”
조선 왕실이 절대 금서로 지정한 예언서인 정감록의 핵심내용이다.
계룡산 연천봉 정상에 새겨진 “방백마각 구혹화생”(482년경에 조선이 멸망한다는 뜻) 은 오늘날까지 지워지지 않고 이 땅에 남아있다. 안채에는 토정비결, 사랑채에는 정감록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조선시대를 장악한 정감록에 대해 알아보자.
정감록은 정감과 이심, 두 사람이 팔도를 유람하다 금강산에 올라 필담을 나누며 미래를 예언하는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정감록의 정은 정 씨. 감은 거울을 뜻하는데, 거울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예언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정감록은 조선의 멸망뿐만 아니라 조선 이후의 미래도 예언했다는 주장도 있다. 판단은 글을 읽는 분들에게 맡기겠다.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중에 배 1천이 정박한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
백두산 북쪽에서 오랑캐의 말이 긴 울음소리를 내면 평안도와 황해도 하늘에 원한 맺힌 피가 넘칠 것이다. <중공군 참전>
정감록은 조선시대 내내 금서였기 때문에, 정본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저술 연대도 확인이 불가능하다. 또한 사람과 사람을 거치며 수백 년 동안 필사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정감록이란 큰 틀 안에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첨삭했을 가능성도 있다. 마치 오늘날의 나무위키와 같은 형태로 전해진 것이다. 현재까지 정감록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것만 40종 이상이다.
정감록은 천문, 점성, 음양오행과 풍수지리 등 조선시대 서민들의 관심을 끌만한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재앙이 닥쳤을 때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장소와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난세에 백성들의 더욱 큰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왜 정 씨인가?
정감록은 하고 많은 성씨 중에 왜 하필 정 씨를 택했을까? 이런 예언서에 등장하는 메시아의 성씨를 아무런 의미 없이 지었을 리는 만무하다. 이 씨 조선에 맞서기에는 김 씨와 박 씨는 설득력이 떨어졌다고 판단했을까?
정 씨하면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떠오른다. 정몽주는 고려입장에서 는 우리의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게 할 만한 인물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충절을 지켰으며, 이방원 의해서 죽어 조선에 대한 원한이 누구보다 크다.
두 번째로 떠오르는 인물은 정여립이다. 조선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무능한 왕 중에 하나인 선조 때 인물이다. 선조는 모든 분야에서 무능했지만 자신의 왕권을 지키는 데는 탁월했다. 조선시대 사대사화 사망자 수를 합친 것보다 많은 사람이 희생된 기축옥사도 그의 시대에 발생했다. 기축옥사의 명분은 정여립이 역모를 일으켰다는 수상쩍은 보고에서 시작되었다. 정여립의 난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조선판 간첩조작 사건의 냄새가 진동을 한다. 정여립은 문무에 뛰어난 탁월한 웅변가였으며, 정계에서 스스로 물러나 ‘만물이 공공재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만약 누군가가 역모라는 누명을 씌우기로 작정했다면, 안성맞춤의 인물이다. 정여립은 난의 진압과정에서 자결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감록의 진인 정 도령의 후보로 손색이 없다.
마지막 인물은 정감록을 추종하는 이들이 정 도령으로 가장 강력하게 믿고 있는 조선의 설계자라 불리는 정도전이다. 조선 건국 최고의 주역 정도전 또한 이방원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이 씨 왕조에 의해 제거된 또는 제거된 것으로 추정되는 뛰어난 인물 중에 정 씨가 유난히 많다.
왜 계룡산인가?
“산천의 기운이 계룡산으로 들어오니, 정 씨가 800년간 도읍을 할 땅이로다.”
정 도령의 정체는 끝내 알 수 없으나, 새 왕조의 도읍지만은 정감록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대사도 이곳을 길지라 하였으며, 소백산까지 태극문양으로 이어지는 계룡산은 풍수지리상 최고 길지 중 하나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오죽하면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 인근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려고 했을까? 이 지역에는 이성계가 궁궐터를 닦았던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정감록이 조선 역사에 정식으로 언급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르네상스라는 영정조 시대이다. 조선시대 문무합의 기구인 비변사에서 1617년 광해 9년부터 1892년 고종 29년까지 처리한 일을 기록한 비변사등록에서 정감록이 최초로 등장한다.
비변사등록 영조 15년,
'함경감사에게 정감록 역년에 관한 이 등도 조사하게 하여 엄히 처단해야 합니다.
'서북 변방 사람들이 정감의 참위 한 글을 파다히 서로 전하여 이야기하므로……. 문제가 심하다.'
비변사등록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정조 6년인 1782년, 정감록은 역모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며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역모의 주모자는 천민 문인방과 양반 이경래였으며, 이들은 강원도에서 시작하여 동대문으로 진입한다는 구체적인 루트까지 완성하였다. 특히 천민이면서 학식이 높아 난의 실질적인 리더였던 문인방은 양반들로부터 선생이라고 불렸으며, 풍수지리에도 정통하였다고 한다. 이 역모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정감록을 내세운 조선 최초의 역모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조정에서는 정감록을 엄히 금하였으나, 한글판까지 등장하며 들불처럼 번졌고 이 불길은 어명조차 삼켜 버리게 된다.
안동 김 씨를 주축으로 한 소수권력자의 세도정치로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 기묘한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불상의 배꼽에 있다는 예언서가 세상에 나오는 날, 이 썩어빠진 나라가 망한다니, 하루빨리 정 도령이건 박도령이건 그 비기를 꺼냈으면 좋겠구먼.”
“그러게나 말일세, 천민들은 몰론이고 양반들과 상인들까지 못 살겠다고 하니 이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조정이란 말인가.”
이 들이 말한 불상은 고창 선운사의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이다. 그리고 아더왕이 엑스칼리버를 얻듯이 동학의 접주 손화중이 불상의 배꼽에서 신비로운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이 돌며 동학은 백성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집필한 동경대전은 정감록의 주요 사상을 채택하고, 문구까지 직접 인용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살고 부자는 죽는다.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없어지고 예법이 다 사라진 다음에야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동학 접주 전봉준은 전주성 전투 전날 농민군에게 부적을 나누어 주며 말했다.
“궁을부를 태워 마시면 적군의 총과 화살이 피해 갈 것이다.”
궁궁을을은 정감록의 주요 내용이며 동학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부적을 만들었다. 정감록이 당시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 세상이 얼마나 썩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46년 최남선이 조선에 관한 상식을 알리기 위해 저술한 문답서인 <조선 상식문답>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광해와 인조 이래 모든 혁명운동에는 계룡산과 정 씨의 그림자가 어른 거렸다.”
정감록은 계룡산 인근에 스스로를 도사라 자처하던 이들을 모이게 했으며, 특히 조선시대 내내 차별받던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북한 지역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영주시 풍기읍이 평안도의 대표적인 특산물인 인견과 인삼의 중심지가 된 것은 정감록 때문이다. 1930년대 북한의 많은 주민이 고향을 등지고 남쪽의 시골마을까지 내려온 것은 풍기가 정감록에서 일컫는 십승지 중의 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십승지란 나라에 난리가 나도 몸을 보존할 수 있는 곳이며, 정승과 장승이 연달아 날 것이라고 정감록은 말한다. 풍기, 공주, 가야, 봉화, 진천, 태백 등 구체적인 장소까지 언급하고 있다. 십승지는 전쟁과 전염병, 자연재해의 삼재를 피할 수 있기에 도심과 많이 떨어진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십승지를 찾아 모여든 사람들이 사는 곳을 감록촌이라고 불렀는데, 감록촌은 1970년대 도시화가 되기 전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었다. 21세기에는 산 좋고 물 좋고, 도시와 먼 십승지를 찾아 힐링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정감록은 다른 형태로 여전히 우리의 삶에 남아있다.
정감록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감록을 지은자도 정감록을 없애려는 자들도 정감록을 통제하지 못했다. 정감록은 오히려 힘이 없다고 느끼는 백성에 의해서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정감록이 빛을 발한 것은 위정자들이 옳은 정치를 하지 못할 때였으며,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의 삶이 평화로울 때는 일부 사람의 손에만 갇혀 있었다는 것을 오늘날의 정치인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