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기고, 걷기 시작한 후부터 우리는 각종 탈 것을 이용하며 살아간다. 나이가 들면서 탈것들도 조금씩 변해갔다.
처음 나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이동 수단은 아니었다.
80년대 어느 한 시절의 골목은 홍콩 할머니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득 품은 꼬마 강시들로 득실거렸다. 온 동네의 아이들이 스카이 콩콩을 타고 강시처럼 골목을 누볐다. 운동신경 하나만큼은 천부적(?)이라고 자부하는 나는 스카이 콩콩 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 손을 놓고 타는 것을 넘어 양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스카이콩콩과 물아일체가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어떻게 그 작은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쳤는지 상상이 안 되지만, 싸구려 배드민턴공이 지붕 위로 내려앉으면 모두가 난감해했고, 집마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 위에는 많은 배드민턴공이 일광욕을 하듯 널려있었다. 누군가 먼저 긴 장대로 지붕 위에 공을 빗물받이까지만 끌어 내리면! 나의 시간이 시작된다.
나에게 스카이 콩콩은 아이언맨의 슈트 같았다. 스카이 콩콩 위에 올라 놀라운(?) 추진력을 이용해 지붕을 향해 힘껏 날아올랐다. 첫 번째 점프에서 하늘로 솟아오른 나는 배드민턴공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두 번째 점프에서 왼손을 그저 스카이 콩콩에 살짝 올려놓은 채, 오른손으로 지붕 위의 공을 집었다. 어른이 되어도 영원히 스카이 콩콩과 함께 할 거로 다짐했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 나는 진정한 상주사람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내 고향 상주는 자전거 박물관이 있을 정도로 자전거로 유명한 곳이다.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 자전거는 그야말로 상주 시민의 발이 되어 주었다. 아빠들과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과 등교를 하면 엄마들은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갔다. 바다 수영을 못하는 섬의 아이들이 없듯이 상주에서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들은 없었다.
학생들은 자전거에 학교에서 버틸 하루의 식량을 (도시락 2개) 싣고 학교로 향했다. 여러 개의 중학교가 모여 있는 어느 다리 위는 자전거가 완전히 점령하였다. 그 다리는 가히 오작교라 불릴 만 했는데, 자전거를 탄 채 러브레터와 선물을 주고받고, 사랑을 꽃피웠다.
30년이 지난 고향에는 내 마음속에 들어왔던 그녀의 자전거를 볼 수 없게 되었다.
93년 2월의 마지막 날, 나는 친구들과 서울행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고향을 처음으로 떠나 각자의 대학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찬동이는 이 열차의 종착역인 서울까지 갈 것이고,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대전을 비롯한 다른 역에 내리게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각자 다른 역에서 내리지만, 서울에 취직해서 자동차 타고 다시 만나자.”
이스트 백에 꿈을 담은 우리는 이 기차가 희망의 나라로 향한다고 확신했다. 우리는 무궁화에서의 도원결의대로 서울의 변두리 곳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생했다. 기차는 나의 청춘을 연료 삼아 쉼 없이 달렸다. 나의 꿈을 세상(회사)에 저당 잡힌 채, 마이너스 통장처럼 나 자신을 까먹으며 삶을 버텨왔다.
기차에 오른 지 25년이 지나 회사에서 좌천을 당하고 나서야, 기차는 마침내 잠시 멈추었다. 회사원 이외의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두려웠다. 불면의 밤이 이어졌고,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몸도 마음도 무너져버린 그때 어린 시절의 자전거가 떠올랐다.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일주했다. 육체적 한계를 이겨내고 나니 심리적 한계가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내는 내게 글쓰기를 권유했고, 나는 그 글쓰기를 통해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 연료를 주입하고, 다시 일어났다.
살면서 각종 탈 것에 의지하고 그럼에도 넘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섰다.
언제가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한 번은 외치고 싶다.
나 아직 안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