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의 동의를 얻어, 소설 원문을 몇 차례 나누어 업로드합니다.
* 가볍게, 즐겁게, 때로는 진지하게! 아무튼 여러 가지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
낯선 동네의 커피숍은 익숙한 향이 났다. 산미 가득한 원두를 그라인딩 하는 소리가 새삼 귓가에 울렸다. 에티오피아? 케냐? 아니면 콜롬비아? 이제는 다 무뎌진 감각은 자꾸만 향으로, 소리로 커피의 고향을 맞히게끔 했다. 벌써 20년도 더 되었다. 커피를 좋아했던 젊은 날, 힘든 줄도 모르게 마셔대던 커피 한 잔, 두 잔이 쌓여 만들어낸 행복한 기억들. 잊힌, 아니 어쩌면 묻혀버린 기억들이 커피 향을 타고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
“기억하세요?”
삶의 전환점을 맞아 찾아온 일본. 도쿄의 어느 작은 커피숍에서 수많은 메일을 기계적으로 정리하던 중이었다. 흔히 오는 광고 메일, 섭외 메일은 적당히 읽고 넘기면 그만이었다. 으레 오는 흔하디 흔한 것들 중 하나일 뿐. 하나, 그중 단 한 통의 메일을 읽는 순간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페이지는 훌쩍 넘는 메시지 속 잊히지 않을 이름 세 글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발신인은 기자. 그는 자신을 한 잡지사의 기자라고 소개했다. 자신이 인물에 관한 특집 기사를 준비하고 있던 중 그의 최근 저서에 중학교 때 선생님을 언급한 대목이 인상 깊었다고, 도대체 영감을 주었다던 그 선생님은 누굴까? 하는 궁금증에 묻고 물어, 찾고 찾아 이렇게 메일을 보낸 것이라고. 구구절절한 내용의 요지는 딱 하나였다.
- 기억하세요? 만나고 싶습니다, 만나서 그분의 ‘중학교 시절’을 듣고 싶어요.
은퇴를 하고 한국을 떠났다. 작가가 되겠다 결심하고 차근히 준비해 온 덕에 교단을 벗어나도 먹고살만한 여유를 얻었다. 한국의 집은 딸에게, 나와 남편은 시간을 남긴 여행자가 되어 세상을 돌아보기로 했다. 더 늙기 전에. 더 아파지기 전에.
뉴욕은 감각적이었지만 시끄러워 힘들었고 호주는 묘한 인종차별이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중국은 음식이 의외로 어려웠으며 태국과 인도는 더운 날씨를 견딜 수 없었다. 여행의 끝은 일본이었다. 도쿄. 20년 전 어린 딸과 함께 했던 여행이 고단했지만 행복했다. 대도시의 화려함과 골목골목 숨어있는 아기자기함이 좋았다. 매일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커피와 빵이라면. 그렇다면.
학교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연락처를 바꾸었다. 업무용 이메일도 작가가 되고서는 아예 유추 불가능한 것으로 새로 만들었다. 필명은 여전히 과거의 그것이었지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교사로서의 정체성은 쉬이 잊혔다. 20년 동안 교사가 아닌 작가로 살다 보니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과의 기억도 서서히 빛바래갔다. 아주 오래된 앨범 속, 조금씩 희미해진 필름처럼.
그럼에도 잊히지 않은 것이 있었다. 메일 속 주인공인 J에 관한 이야기라면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인사 나누지 못하고 떠나보낸 아이였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말 한마디가 도움이 될까 고민하면서도 벌써 답신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저는 지금 일본에 있습니다, 한국을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는데, 어떤 방식으로 인터뷰를 하실 생각인가요?
- 딸랑
풍경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여름날 도쿄의 풍경 소리는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 있었다. 묵직하면서도 단단한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또각, 또각, 하는 소리의 끝은 내 앞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K매거진의 이윤성기자입니다.”
선생님, 선. 생. 님. 오랜만에 들어보는 낯익은 단어에 고개를 들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어떤 큰 실패 없이 인생의 고통 없이 기자가 된 자의 맑음이 눈부셨다. 선생님이란 말을 얼마 만에 들어보는 것인지. 밝은 톤의 블라우스와 곧게 다려진 슬랙스가 단박에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기야, 특집 기사를 위해, 일본까지 건너온 그 마음이라면.
“네. 반가워요. 저는 조금 일찍 와서 먼저 마시고 있었네요. 뭐 드실래요?”
제가 사드렸어야 하는데, 사드리려고 제가 편집장님께도 법인카드를 받아왔는데, 하며 멋쩍게 웃는 모습이 싱그러웠다. 20대의 젊음이란, 아직 때 묻지 않은 마음이란 이런 것일까.
“도쿄까지 오셨는데 제가 사드리고 싶어요. 여기는 말차라테가 맛이 좋아요.”
녹차를 덖는 소리. 진하고 알싸한 차향이 번지는 시간 동안 우리는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20년 전의 이야기.
“그래, J에 관해 궁금한 게 있으시다고요?”
“그럼요. 아시다시피 J작가님이 한국에서 엄청 유명하세요. 베스트셀러도 이미 다섯 권이나 있으시고 전공 분야에서 알아주는 전문가시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최근에 낸 에세이집에서 ‘중학교 때 선생님’에 대해 언급을 하셨더라고요. 그 때문에 인터넷엔 벌써 ‘J작가의 중학교 시절’에 관한 내용들이 퍼지고 있고요. 그런데 그런 거 말고 정말 그때 그 시절을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더라고요. 이거 완전 특종이잖아요?” 하여 웃던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데 선생님. 다른 기자랑 먼저 인터뷰하신 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