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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말을 하지 (2)

# 모둠 수업을 깔끔하게 멈추고.

by 안녕

집안까지 따라 들어온 불편한 감정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숨 쉬듯 이어지는 집안일을 마치고 모두가 잠든 시간이 될 때까지도

마음속 불편함은 가시가 되어 콕, 콕, 코옥. 찔러대고 있었다.


외면하면 그만이었다.

적당히 수업하고, 시험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만큼만 일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테니까.


원인을 찾지 않았나.

아이들의 학력이 문제이니, 그에 맞게 내용을 조정하면 될터.

그런데도 뭔가 개운하지 않았다.


그건 마치, 아주 아주 아주 나이 많은 어른이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 살 아이가 어려운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넌 왜 도대체 노력을 안 하냐?"라고 핀잔을 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디디다, 북녘, 움트다를 모르는 것은 논외로 한다. 그것은 정말

심각한 어휘력 부족이다. 하나, <봄은>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지.)


어쨌든 가르치는 사람 아닌가.

매주 20시간씩 만나는 아이들 아닌가.

아이들 탓으로 돌리면 문제가 해결되나?


아니었다. 얘들은 원래 공부를 안 하니까,

학력이 낮은 지역이니까, 하는 핑계를 대면 댈수록

수업의 질은 떨어질 것이고, 아이들은 더 배울 기회를 놓칠 것이다.

내가 만나왔던 수많은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여러 가지 이유로 기초를 다질 시간이 없었다면

그에 맞게 알려주고, 도와주면 된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그렇게 한 계단씩 올라가다 보면

결국 저마다의 결론을 얻게 마련이었다.

내가 겪어왔던 수많은 일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입교사 때의 일이다.

학습지라는 걸 만들어야 했다.

교과서만 가르치는 것도 벅찬데 학습지라니.

그것도 제일 싫어하는 읽기 단원.


눈앞이 캄캄했다. 불이 전부 꺼진 방 안을 휘저어도

이보다는 덜 답답할 것 같았다.

나는 매일 밤 학교 문을 닫고 퇴근을 했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작디작은 고시원 방 안에서

덜덜 거리며 겨우 돌아가는 노트북의 열기를 선풍기로

식혀가며 어찌어찌 만들어 간 학습지의 처참한 실패를

아직도 난 기억한다.


만약 그때 누군가 나에게

학습지는 2페이지를 넘지 않는 것이 좋고

가능하면 폰트는 일정하게 통일하는 것이 좋고

가장 중요한 학습 내용엔 빈칸을 두거나

적절한 공간을 만들어 두라고만 알려주었어도

첫 학습지를 3장(6페이지)으로 만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의 첫 제자인 아이들이 학습지를 받아 보며

한숨을 쉬는 일도, 그 이후 위축되어 출판사의 학습지만

받아 조금씩 바꿔 쓴 세월이 5년 가까이 되지도, 않았을 일이다.


모든 처음엔 어느 정도의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다.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순 있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수업도 마찬가지.

<봄은>을 가르치려면

신동엽 시인의 삶을,

1945년~1950년까지의 현대사를,

그리고 시의 상징적 의미를,

아이들에게 알려 주었어야 한다.


역사적 지식이 거의 없고

'신동엽 = 개그맨'이라고 연관 지으며

아직도 비유와 상징이 헷갈리는 아이들에겐

적절한 강의식 수업이, 정확한 정보를 친절하고 쉽게

알려주는 수업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 모둠 수업이 좋은 거니까, 너희들이 한 번 머리를 맞대고

이 (어려운) 6문제를 풀어봐.


하는 마음은 사실, 그저 교사가 만족하고자 하는,

그러니까 내가 아이들을 생각하게 하는 수업을 하고 있구나-

하며 만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더 거칠게 말하면, 모둠수업 하는 '연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이 하라니까 하겠는데

단어 뜻도 모르겠고

왜 봄이 남해나 북녘에서 안 오는지도,

바다와 대륙은 뭔지도 모르겠는

그 멍하고 답답한 얼굴.

그 얼굴은 15년 전의 나를 닮아 있었다.


방향을 원했던,

설명을 원했던,

신규 시절의 나를.


우리는 흔히 머리를 맞대고 토의를 하면, 혹은 토론을 하면

문제를 훨씬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들 말한다.

교육 현장에서 강의식 수업보다 '배움 중심 수업', '모둠 수업'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식을 주입하기보다는

지식을 바탕으로 가치를 창출하며

더 나아가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관점을 기르는 교육.

그 교육을 위해서 강의식 수업은 어쩐지 일제 교육의 잔재로

꺼려지고 있다.


그러나.


알아야 말을 한다.

무언가에 대해서 말을 하려면

그 '무언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알려면 배워야 하고,

배우려면 어쨌든 듣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학습자의 수준이 비슷하다면

그때 교사는, 적절하게 개입하며

필수적인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앎이 없는 대화는 허울뿐이며

그런 대화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마음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짜 깨달으려면

우리 머릿속에 앎이 있어야 한다.


전율이 일었다.

방법을 바꾸고 싶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의 아이들에게

자꾸만 생각을 쥐어짜 내라고 하지 말자,

설명하자, 알려주자, 강조하자,

그러니까 강의하자.


그다음 시간부터 바로,

수업을 바꾸기로 했다.


모둠은 잠시 멈춰 두고

시를 분석하며 필기할 수 있는

여백이 넉넉한 학습지를 준비했다.


그리곤 운을 뗐다.


방법을 바꿨어.

선생님은 지금부터 강의를 할 거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여러 번.

왜냐고?


알아야 말을 하잖아.

생각이 생겨야, 다른 사람들 말을 듣고 다시 생각을 하잖아.

그래야, 그게 배움이잖아.


그러니까, 지금부터 필기구 챙기고 잘 따라와.


몇몇은 이미 시작 전부터 졸 준비를 하고 있었고

몇몇은 설레는 표정으로 볼펜과 형광펜을 준비했으며

몇몇은 프린트에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껍데기는 가라>의 강의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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