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글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있었던 그날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
덕분에 일을 할 때 유리하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잘 기억한다.
기록을 좋아하는 편이다.
<메모광>이란 수필을 아시는지? 메모를 사랑해서 친구 집에 두고 온 메모지를 찾으러 먼 길을 돌아갔다는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아왔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나의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기록해 둔다.
덕분에 아주 오래된 인연도 곱씹을수록 생각이 나는 편이다. 여러모로 좋다.
오늘은, 코로나가 한창 전 세계를 떠돌며 힘들게 했던 2020년에 만난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2007년생으로 지금은 고2가 되었을 녀석과 처음 만난 것은 2020년 9월, 글쓰기 수업에서였다. 당시 1학년 수업도 들어갔던 나는 글쓰기 강좌를 열어 희망자 25명과 글을 쓰기로 되어 있었다. 뭘 할까 고민하다가 궁여지책으로 만든 강좌. "이야기 창작반" 스스로 글을 잘 쓰진 못하지만 글 쓰는 것을 좋아하기에 만든 그 수업에서 해수는 단연 돋보이는 아이였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반짝였다. 중1이라 어려울까 봐 수업 초기엔 단순한 서사의 소설을 읽혔는데 그때마다 늘 아쉬워했다.
"쌤, 도대체 우리는 소설 언제 써요?"
"지금 보여주신 소설은 재밌긴 한데, 조금 서사가 단순하고 인물이 평면적인 것 같아요."
라며 똑 부러진 소리를 했다. 25명 중 20명 정도가 자신만의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열망이 넘쳐흘렀다. 온라인 수업에서 글쓰기가 가능할까 싶어 고민하다 결국, 글쓰기 활동을 시작했더랬다.
온라인 수업에서는 글을 쓰고 난 후 제출하게 하고 다음 주에 피드백을 해주었다. 다른 친구들의 글을 읽으며 조언해 주고 서로 고치며 성장했다. 개인 작품을 쓰기도 하고, 모둠 작품을 쓰기도 하며 그렇게 글로 서로를 이해하며 2학기를 보냈다.
긴 생머리를 뒤로 넘기고 노트에 메모를 하며 늘 수업에 집중하던 해수의 글감은 늘 통통 튀었다. 작은 체구, 동글동글한 얼굴과 서글서글한 말투와 다르게 글감은 꽤나 진지했고 시사적인 것들도 많았다. 한 유튜버의 과거사 논란,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한 이야기 등등, 녀석의 소설은 읽기에 좋았다. 서사가 탄탄했고 반전을 적절한 타이밍에 줄 줄 알았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군데군데 부족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특유의 '재미'가 있었다.
특히 좋았던 점은 소설 속 주인공은 10대가 아니라는 것.
보통 아이들에게 소설을 쓰라고 하면 주인공의 나이가 보통 10대다. 경험의 폭이 작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늘 비슷한 내용인 게 아쉬웠다. 전학을 가거나, 친구와 사이가 멀어지거나, 하는 등의 학교에서 벌어지는 소재는 본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야기가 확장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 기로에서 아이들은 늘 고민했다.
해수는 과감했다. 첫 작품에선 주인공의 나이를 25세에서 26세로 설정했다. 직업도 흥미로웠다. 유튜버, 형상, 경찰 등등. 사건도 나름 치밀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보였다. 2년 넘게 고민한 이야기라는 부연 설명은 거짓이 아니었다. 글감은 늘 통통 튀었다. 상상력의 끝은 어딜까 싶을 정도로. 장면 묘사도 훌륭한 편이었다.
소위 말하는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전형적인 모범생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과제를 놓친 적도 거의 없었다. 오히려 책임감이 무척 뛰어났다. 가령 오늘 자정까지 글쓰기 과제를 올리라고 하면
“아. 쌤. 제가 지금 구상 중인데요. 오늘 중으로 올려도 될까요?”
라며 아쉬운 소리를 하곤 했지만 약속을 어긴 적은 없었다. 제 나름대로 구상한 글을 끝까지 완성하고 제출했다. 그 시간이 언제고 꼭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아이였다. 해수는.
한 번은 아이들의 맞춤법 실력이 너무 심각해서 오프라인 수업을 할 때 쓴소리를 한 적이 있다. 너희들이 쓴 글을 꼭 피드백해라, 출판되는 책이 맞춤법, 띄어쓰기, 문법이 틀리는 것은 작가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하고. 해수는 집중했고, 스스로 점검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최소한 '절대 너를 사랑해.', '비단 그 일은 어려워.' 따위의 문장을 적어 제출하지는 않았다. 그건, 편집부로서 두 권의 소설집을 편집한 해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을 테다.
글을 모아 책을 만든다고 했을 때 필명을 '여왕'이라 지은 이유도 역시 해수 다웠다.
"예전엔 공주가 되고 싶었는데요. 공주보단 여왕이 더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어서 좋아요. 그래서 지금부턴 '여왕'이 되려고요."
결심을 실천에 옮긴 해수는, 내가 아이들과 수업을 통해 만든 두 권의 책에 모두 세 편의 소설을 실었다.
여왕은, 진짜 작가가 되었다.
인연은 이듬 해로 이어져, 2021년엔 해수를 '국어 수업'에서 만나게 됐다. 단연코 압도적으로 열성적이었다. 온라인 수업이든 오프라인 수업이든 늘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구글 미트를 연결할 때마다 카메라를 켜며 수업을 들어주었다.(나 역시도 온라인 연수 때 카메라를 켜는 경우가 거의 없다....) 덕분에 난 2학년 11반 수업이 많이 행복했다.
두 시간 넘는 통근 거리 때문에 셔틀버스에 올라타서도 수업 준비를 해야 했던 그 험악하고도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해수, 그리고 해수의 글 덕분이지 않았나 싶다. 여왕처럼 살고 싶다던 해수가 열넷, 열다섯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며 열심히 삶의 조각을 맞추어 나가는 모습이 많은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한창 우울감을 앓던 나는 2021년 1월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지금까지 쭉, 이곳에 글을 쓰고 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은 2020년 가을의 글쓰기 수업 덕분일지도.
그래서 나는 해수가 지금도 꾸준히 쭈욱, 자신만의 글을 적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고등학생이 되어 생각이 더욱 깊어졌을 녀석이 쓴 글을 읽어보고 싶다. 다시 그 시절 우리 이야기 창작반 클래스룸으로 들어가서 과제로 소설을 올리라고 하고 싶다. 그러면, 나는 해수의 소설에 제일 먼저 댓글을 달 것이다.
- 역시, 해수!
라고.
덧붙임 1. 2년 전에 해수와의 글쓰기 수업과, 그의 인터뷰를 브런치에 올린 적이 있다. 그해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제출하려고 쓴 글이었는데 아쉽게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준 녀석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하며 그때의 글을 올려본다.
이번에는 꼭, 세상에 너를 알릴 수 있기를.
13화 [인터뷰] 해수의 이야기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