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시부모님과 아기 키웁니다만 #3
결혼식이 끝난 뒤, 나는 인도와 한국을 오가며 살았다. 인도에 있을 때는 재택근무가 가능했고, 한국에 돌아오면 다시 사무실로 출근했다. 출근용 슬랙스를 벗자마자 인도에서는 살짝 늘어난 바지와 향신료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나라의 시간, 두 도시의 공기를 오가며 나도 점점 ‘이중생활 전문가’가 되어갔다.
혼인신고도 두 번 했다. 먼저 인도에서, 그리고 다시 한국에서. 같은 결혼인데, 국경이 달라지면 서류도 언어도 다 달라지는 게 신기했다. 사랑은 하나인데, 증명서는 두 개였다.
우리는 서둘러 2세를 계획하진 않았다. 낯선 나라와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는 게 먼저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한국에 있을 때 ‘서울시 무료 산전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결과는 모두 “정상”이었다. 그날, 진료실을 나서며 남편이 말했다.
“우리 아직 멀쩡하대.”
그 한마디에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이국의 결혼, 국경을 넘은 서류, 낯선 리듬 속에서 이렇게 작은 안도감이 우리를 이어주고 있었다.
인도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 몇 주 되지 않았을 때였다. 원래 생리 주기가 불규칙했지만, 이번엔 이상하게 텀이 길었다. ‘설마 내가…?’ 하는 촉이 왔다. 남편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오라고 했다. 테스트 후 결과까지 3분. 짧지만 이상하게 긴 시간이었다. 나는 너무 궁금해서 혼자 먼저 확인했다.
촉이 맞았다. 두 줄.
테스트기를 들고 남편에게 다가가 말했다.
“My love…”
그는 내 손의 작은 막대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둘 다 눈이 그렁그렁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이, 그날 우리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기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무언가가 달라졌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변했다. 기쁘면서도, 묘한 책임감이 밀려왔다. 이제 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실감이 났다. 테스트기 두 줄을 다시 확인한 우리는 병원으로 향했다. 산부인과는 아니고, 임산부 초음파를 전문으로 보는 곳이었다. 나는 외국인 산모라 절차가 조금 복잡했지만, 남편이 지인 찬스를 써서 어렵지 않게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화면 속에 작은 점 하나가 반짝였다. “축하합니다. 8주 차네요.” 그 깜빡임은 아주 작았지만,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뚜두둑, 뚜두둑—’
그 규칙적인 리듬이 너무 신기해서, 우리는 그 소리를 녹음했다. 아직 손톱보다도 작을 텐데, 그 작은 생명이 벌써 우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배는 티 나지 않았지만 드라마 속 “우엑, 우엑—” 그 장면이 현실이 되었다.
그동안 TV를 보며 “진짜 저렇게까지?” 했는데, 그게 진짜였다. 정말.
나는 오래 해외에서 살았지만, 철저한 한식 파였다. 중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할머니표 된장찌개로 하루를 시작했고, 일본에서 대학과 직장 생활을 하던 5년 동안도 김치는 나와 늘 함께했다. 영국, 스위스 어디에 있어도 김치만 있으면 살 수 있었다. 김치찌개, 김치전, 김치볶음밥—
내 삶의 에너지 삼총사였다.
그런 내가 인도에 와서 마살라 향이 가득한 세끼를 맞이하게 됐다. 결혼 초반엔 시어머니의 손맛 덕분에 별문제 없었다. 로티 두세 장에 다양한 채소를 볶은 삽지 (Sabji)를 곁들이면 꽤 맛있었다. 그런데 임신을 하고 나니, 그 향이 더 이상 향이 아니었다.
모든 음식 냄새가 나를 공격했다. 주방에 한 발만 들어가도 마살라 향이 코를 찔렀다. 나는 거의 매일 화장실로 전력 질주했다. “우엑”은 나의 하루 인사말이 됐다. 그때 깨달았다. 인도에서 ‘냄새 없는 하루’는 불가능하다는 걸. 그러다 문득, 그립기 시작했다.
“아… 김치 냄새 한 모금만 맡고 싶다.”
그때부터 나는 한국 음식을 찾아 헤매는 인도 내 미션 임파서블에 돌입했다. 뉴델리에 혼인신고 때문에 한국대사관 갔었는데, 거기서 나처럼 인도 남자와 결혼한 또래 친구를 알게 되었다. 그 친구에게 인도에서 한국 식재료를 온라인으로 구매 가능한 방법을 물어보았다. 친구는 구세주처럼 한국 식재료 쇼핑몰을 알려주었다.
운영자는 한국분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김, 라면, 고추장, 된장, 깻잎 캔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김치를 찾았는데, 없었다.
‘설마 김치가 품절인가요?’라고 왓츠앱으로 문의하자, 대표님이 답장을 보내셨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김치는 큰 도시에 대량으로 주문하시는 고객에게만 보냅니다. 그 지역에 한국분이 사시는 줄 몰랐어요.”
내가 사는 곳은 인도 중부의 마디아프라데시(Madhya Pradesh). 뭄바이 영사관에서도 “그 지역엔 한국 교민 거의 없어요”라는 말을 들었었다. 즉, 나는 인도 한가운데 고립된 유일한 김치 러버였다. 어쩔 수 없니 김치는 포기했다.
한국 식재료가 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으깬 감자와 과일을 먹으며 버텼다. 종종 내가 먹을만한 아시안 퓨전 음식점에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입덧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상하게도 내 머릿속엔 늘 음식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아귀찜, 낙곱새, 비빔밥, 파전, 마라탕… 그중에서도 아귀찜은 거의 환상 속 연예인처럼 등장했다.
“매운 콩나물, 자작자작한 양념 국물, 그 붉은색… 아, 미치겠다.”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돌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한국에서 어렵게 받아본 식재료 소포도 내 입덧을 잠재우진 못했다. 그 시기, 나는 매일같이 냄새와 싸우고, 향신료와 전쟁을 치렀다. 입덧이 심해지면서 남편과의 말다툼도 늘었다.
남편은 “12주 차까진 안정이 제일 중요해. 그때까지만 인도에서 지내자”라고 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했지만, 감정적으로는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몸도 마음도 모두 낯설었다. 무엇보다 그리웠다 —
할머니의 된장찌개 냄새, 엄마가 부엌에서 내는 프라이팬 소리, 그 따뜻한 밥 한 끼가.
아기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다. ‘인도에 대해 아는 것도 없이, 이렇게 멀리 와서 결혼을 하다니.’ 늘 ‘낯선 곳’에 잘 적응하던 나였지만, 이번엔 달랐다. 입덧, 향수병, 그리고 고춧가루 금단현상 —
3단 콤보였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임신 12주 차가 되던 주,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남편은 업무 때문에 인도에 남아야 했지만,
“네가 편해야 아기도 편해.” 그 한마디에 마음이 녹았다. 시부모님도 “한국 가서 잘 쉬고 오라”며 보내주셨다.
한국으로 가기 전, 인도 결혼식 때 함께했던 절친 언니가 뉴델리에 잠시 들렀다. 그녀는 내게 구세주를 건넸다 — 바로 ‘컵밥 세트’. 참치김치, 매콤낙지… 그날 나는 눈물 대신 침을 삼켰다. 점심, 저녁, 그리고 야식까지 컵밥으로 버티며 한국행 비행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출국 날, 남편이 공항까지 함께 와주었다.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한데 뒤섞였다. 나는 13주 차의 아기와 함께, 낯선 향신료의 나라를 잠시 뒤로한 채 다시 ‘나의 냄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임신이라는 신세계에서 새로 배운 것들>
입덧은 보통 임신 약 5주부터 시작되어 9주경 가장 심해지며, 16주~18주경에 완화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개인차가 크고, 20주까지 지속되거나 심한 경우 임신 기간 내내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인도라는 세계에서 새로 배운 것>
인도 마살라 ( मसाला masālā)는 요리에 들어가는 혼합 향신료를 뜻한다. 마살라는 수십 가지가 넘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람 마살라(따뜻한 향신료 믹스), 차트 마살라(새콤한 스낵용), 탄두리 마살라(구이용), 파브 바지 마살라(채소 카레용), 비리야니 마살라(쌀 요리용), 라싸 마살라(요구르트 음료용) 등이 있다. 지역마다, 가정마다 배합이 달라 정확한 개수를 세기는 어렵지만, 용도와 지역별로 분류하면 20~30가지 정도가 일반적으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