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성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과 앞으로 성생활을 하지 않을 사람의 성토크
신학교에는 각 교구에서 파견 나온 상주 신부님들이 있다. 대개 유학을 가서 박사 학위를 받은 신부님들이다. 전공에 따라 강의도 하고 자기 교구 신학생 지도도 맡아했다. 대구 교구가 제일 크고 신학생 수도 많다 보니 대구 교구 신부님들이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마산교구, 청주교구, 안동교구 순이었다. 당시 재학 중이던 마산 교구생은 약 40명이었고, 신부님은 3명이었다. 이들 세 신부님이 마산교구 신학생들의 생활을 일차적으로 지도했다.
신학생마다 영성 지도 신부님도 따로 있었다. 말 그대로 신학생들의 영성을 지도하는 신부님이었다. 신학생들은 자신의 영성 지도 신부님과 정기적으로 면담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에 신학교 생활의 어려움도 이야기하고, 고백성사도 보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영성을 지도하는 신부님이니 내면 깊숙한 이야기도 솔직하게 했다. 주로 내가 이야기를 하고 신부님은 듣는 쪽이었다. 그런 관계다 보니 영성 지도는 다른 교구 신부님이 맡아했다.
신학생 때는 스승과 제자 관계지만 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고, 교수 신부가 임기를 마치고 교구로 돌아가면 동료 교구 신부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영성 지도 신부님은 대구 교구 신부님이었다. 키가 작고 얼굴이 가무잡잡했다. 소심한 소도둑놈처럼 생긴 모습이 나와 비슷해 마음이 편했다.
천국이 지옥으로 바뀌는데 걸리는 시간은?
신학교 저학년 때는 개인 공간이 전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24시간 동료 신학생들과 한 공간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갈등이 없지 않았다. 앞에서 신학교 생활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했지만 나무가 크면 그늘도 넓은 법이다. 신학교 역시 인간 군상들의 집합체다 보니 일반 사회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대부분 벌어졌다. 다만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기본적으로 개차반은 없다 보니 정도만 심하지 않았을 뿐이다.
신학교 입학한 지 1주일쯤 되었을 때다. 아버지 신부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 신부님이란 가톨릭 신학생들이 자신을 신학교에 보내준 신부님을 일컫는 말이다. 아버지 신부님이 없는 신학생은 없다. 신학생과 아버지 신부님과의 관계는 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불가의 은사 스님처럼.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나의 아버지 신부님도 정말 좋은 분이셨다. 진짜 아버지처럼 날 아껴주셨다. 나 역시 신부님을 무척이나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런 신부님에게 신학교 입학 1주일 만에 보낸 편지의 주제는 ‘천국’이었다. 신학교가 마치 천국처럼 좋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편지를 받아 본 신부님이 얼마나 웃었을지 웃음이 난다. 당신도 신학교 생활을 하신 분이었다. 당연히 신학교가 어떤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천국 같았던 신학교가 지옥 비슷한 곳으로 바뀌는 데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라틴어와 상관없는 별개의 변화였다. 천사 같았던 같은 방 동료 신학생들이 마귀의 족속같이, 뭐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튼 꼴도 보기 싫은 동료 신학생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싫어하는 동료는 일거수일투족이 싫었다. 질질 끌고 다니는 실내화 소리도 싫었다. 문을 쾅쾅 닫고 다니는 것도 싫었다. 물을 틀어 놓고 양치질하는 것도 싫었다. 청소시간에 농땡이 부리는 것도 싫었다. 닭튀김이 나온 식탁에서 맛난 부위만 골라 먹는 것도 싫었다. 쩝쩝거리며 먹는 것은 더 보기 싫었다. 아흑! 그러다가 사소한 갈등이라도 생기면 다툼이 일어났다. 놈이라고 내가 예쁘게 보일 리 없었을 테니.
다행히 서로가 개차반은 아니다 보니 일반 사회처럼 ‘야이 게시판아, 신발아’하면서 싸우지는 않았다(음, 고백하자만 나는 욕 좀 했다). 대신 그렇게 화끈하게 한 번 싸우고 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너저분하게 싸웠다. 두꺼운 글로브를 껴 외상은 안 났지만 속으로 골병이 드는 주먹질을 서로 해 댔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두 번 이상 성당에 드나들며 기도를 하고 미사를 하고 성체를 받아 모셨다. 인간이 참 요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7할은 나 자신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고, 3할쯤은 다른 신학생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방학 때 교구로 돌아가면 본당 신부님이나 아버지 신부님에게는 늘 좋은 이야기만 했다. 신학교 생활 잘하고 있다고. 그분들도 신학교 생활을 하신 분들이니 굳이 힘든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에게는 다른 이유로 말하지 않았다. 걱정할까 봐. 아마 가족들은 신학교가 천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얼추 성인군자쯤 되는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인 줄 알았을 것이다. 실상은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영성 지도 신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힘들었던 신학교 생활의 정서적 고통들. 대개는 혼자 삭히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리스크가 큰 것들도 분명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영성 지도 신부님이었다. 다른 교구 신부님이라 기본적으로 정서적 거리감이 있었고, 그렇지만 교수 신부님이었으니 직접적으로 나의 신학교 생활에 책임 있는 분이었다.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좋은 대상이었다.
영성 지도 신부님은 내 이야기를 늘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다 듣고 나면 ‘거쳐야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취지의 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뒤 생각해보니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가 맞았다. 당시에는 신학교를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괴로운 것이었지만.
젊은 청춘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육체적 욕구에 대한 고민도 상당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내 육신이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통과의례란 점잖은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에 딸린 신체발부들이 서로 어깃장을 놓으며 일종의 내란을 일으키는 것이라 진압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군과 적군이 잘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통과는 하겠지만 그 과정이 결코 의례적이지는 않았다. 상당히 내상이 심했다.
건강한 남자로서 가지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호기심을 넘어 날카로운 자극으로 나를 공격하는 또 다른 나. 강하지도 않은 멘털로만 극복하기에는 참으로 어렵고 난감한 일이었다. 모르긴 해도 신학생 대부분이 겪어야 하는 공통 필수 과목이었을 것이다. 이런 문제들도 영성 지도 신부님과의 면담 시간에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영성 지도 신부님과 마주 앉아 이런 성 상담을 하다 보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을 때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어깨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그런데 면담을 마치고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느낌만 들었을 뿐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세월이 많이 지난 뒤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성 지도 신부님이라고 성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신부님 자신도 그 문제만큼은 미성숙하고 미완성 상태였을 것이다. 순전히 나의 추측이지만, 그 부분에 한해서는 미숙하기가 신학생인 나와 신부님이 오십보백보이지 않았을까? 게다가, 당시 나의 영성 지도 신부님은 40대 중반이었다. 내가 그 나이가 되어보니 미완성 상태가 아니라 예전에 없던 문제까지 추가로 발생하면서 20대보다 질과 양적인 면에서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 성 문제였다. ‘불혹’의 나이가 아니라 ‘미혹’의 나이가 되어 별것 아닌 것에도 마구 유혹을 느끼고 그랬다. 사정이 그랬으니, 그때 내 이야기를 듣던 신부님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현재 성생활을 하지 않는 신부님과 앞으로 성생활을 하지 못할 신학생이 마주 앉아 성을 주제로 나누는 이야기라니. 물론 그러한 조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성생활의 테크닉에 대한 고민이 주제인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만약 그랬더라면 난센스도 그런 난센스가 없었을 것이다. 성의 근본적 의미에 대한 고민이 주제였던 만큼 성생활의 활발한 경험과는 무관했으리라. 아무튼 그랬다. 계속 이야기하자니 참 거시기하다.
에필로그 – 신학생이 감히!
1988년 개봉해 화제가 되었던 <매춘>이란 영화가 있었다. 나영희란 배우가 주연한 영화였다. 제목과 달리 사실 이 영화는 좀 슬픈 영화였다. 사회의 그늘진 영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디테일하게 다룬 영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감독의 의도였을 뿐이다. 세간에서는 개봉 전부터 영화 도중 실제 정사가 벌어질 뻔했네, 남녀 배우들의 나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네, 하면서 온갖 자극적인 소문들만 폴폴 풍겼다. 제목이 그렇다 보니 사람들도 그런 말에 솔깃했다.
당연히 감독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회학적 의도는 뒷전이었다. 관객들은, 정확히 표현하면 남성 관객들은, 어떤 소설가의 표현을 빌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생 전체를 발정기로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들은 언제쯤 화끈한 장면이 나오는지 침을 흘리며 지켜볼 뿐이었다. 2학년이었던 나는 그 자유로운 영혼들 틈에 끼어 보고 싶었다.
자유로운 영혼도 좋지만 혼자 가기에는 좀 거시기했다. 정황으로만 보면 혼자 몰래 가서 봐야 하는 영화였지만. 그렇다고 범생이류 동기 신학생들을 꼬실 수는 없었다. 나를 이상한 놈으로 볼까 봐 겁이 났다. 타깃을 예비역 형들 쪽으로 돌렸다. 대학도 졸업하고, 군대도 갔다 왔으니 그런 영화쯤에는 면역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친하게 지내던 한 형에게 접근해 같이 가자고 했다. 대구 교구 형이었다.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 태도를 ‘예전에 (신물 나게) 많이 봤어’로 해석했다. 읍소 작전으로 바꿨다. “형, 나를 위해 같이 가줘요. 그 영화 안 보면 신학교에서 짐 쌀 것 같아요. 형은 가서 앉아 있기만 해. 영화비도 내가 낼게.’’그래도 미온적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어라? 그 형의 이야기를 분석해보니 ‘(신물 나게) 많이 봤기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았다.
형은 겁을 내고 있었다. ‘신학생이 어떻게 감히 그런 영화를?’ 나는 ‘오늘 하루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자는 취지의 말을 하며 꼬셨다. ‘자유로운 영혼’이란 멋진 말에 넘어갔는지 ‘오늘 하루만’이란 말에 넘어갔는지 그건 모르겠다. 아무튼 수요일 외출 시간에 나를 따라나섰다. 여전히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신학생들의 자유로운 ‘나와바리’였던 대백으로 갔다. 그때는 이미 개봉관에서는 내려간 상태였다.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대백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 안에 소극장이 10개도 더 있던 시절이었다. 첫 번째로 찾아간 극장에 떡 하니 상영하고 있었다.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온적이던 형은 초조해하는 눈빛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영 불안해 보였다.
”형, 왜 그래? 교수 신부님 만날까 그래?“
”음... 그게...“
농담으로 한 말인데 진짜로 알아듣는 눈치였다. 이런! 100석 정도 되는 단층 짜리 극장이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자리가 없었다.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평생을 발정기로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간에 자유로운 사람들임은 분명했다. 수요일 오후였으니까. 덕분에 풀타임 서서 관람했다. 영화가 얼마나 찐하고 화끈했는지 다리 아픈 줄도 몰랐다.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왔다. 기대 이상으로 야한 영화였다. 감독의 사회학적 의도를 알아차릴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놓치기 아까운 장면들이 수두룩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극장을 나서는데 뭔가 가득 채워진 듯한 느낌, 갈증이 해소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참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 미묘한 느낌이었다.
형의 얼굴을 살폈다. 원래 얼굴이 조그맣고 하얀 사람이었다. 약간 발그레한 것이 상기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형 역시 뭔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고마워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뭐지 저 표정은? 이 형의 정체가 도대체 뭐야?’
영화를 보고 나왔으니 의례적인 감상평을 물었다. 형은 엉뚱한 말을 했다. 보아하니 극장 안에서 영화와 물아일체를 이루다가 아직 현실로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그런 쪽’으로 멘털이 약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영화였다. 처음으로 빨간책을 본 중학생처럼.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는 건전 영화류에 속하겠지만 말이다.
”너 아니었으면 내가 언제 이런 영화를...“
말이 아리송했다. 고맙다는 이야기인 것 같긴 했는데, 장한 일을 하고 나온 것이 아님을 생각하니 욕 같기도 했다.
”그게 뭔 말이야 형?“
형은 대답이 없었다. 감사 인사면 어떻고 욕이면 어떠랴?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했으니 패스. 우리는 시계를 보며 대백 쪽으로 걸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냐에 따라 우리의 동선은 달라질 것이었다. 햇빛이 유난히 찬란한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