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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신앙의 상관관계1

신학을 공부하면 신앙이 깊어질까?

by 우연의 음악 Oct 12. 2021

신학생 시절, 내가 신학생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깊은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랬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깊은 신앙인이었을까? 답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답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질문을 좀 더 확대해보자.    

  

‘신부님이나 목사님, 스님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깊은 신앙인일까?’ 

아, 다른 종교인들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니까 패스.

신부님들은 모두 깊은 신앙인들일까?’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다니는 성당을 거쳐 간 여러 본당 신부님들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답변이 쉽지 않은 질문, 맞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주교님들은 모두 깊은 신앙인일까?’     


가톨릭 신자라면 즉각적으로 대답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아무렴, 주교님인데!’ 그런 정서적 판단 말고 사실에 기초해 객관적인 답을 부탁한다면? 


대한민국에 주교님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수십 명 정도. 신자들은 주교님을 만날 기회도 많지 않다.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따라서 신부님보다 답변이 더 쉽지 않을 것이다. 질문을 해보긴 했지만 둘 다 참 답이 쉽지 않은 질문이다. 개인의 성향과 품성에 따른 변수가 너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 보자.



2022년 현재,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 주교는 40여 명 있다. 이 분들은 깊은 신앙인들일까? 질문이 무척 불경스럽다는 것, 인정한다. 



신학을 공부하면 신앙이 더 깊어질까?’     


신부님과 주교님들의 공통점은 모두들 신학을 공부했다는 점이다. 뭔가 정답을 맞힐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켜보자. 신학과 신앙을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학생이던 나를 깊은 신앙인으로 바라봤던 사람들이 그런 부류다. 그렇다면 정말 그럴까?      


이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인간을 포함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 창세기 천지창조 편을 보자. 언제 만들어 두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은 이미 하늘과 땅을 만들어 두었다. 다만 하늘과 땅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한 덩어리로 뒤엉킨 것이 좀 엉망인 상태였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개신교 성서 학자들과 가톨릭 성서 학자들이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에 따르면.     

 

1일째 - 빛과 어둠을 만들다. 

2일째 - 하늘과 바다를 만들다

3일째 - 땅과 온갖 식물을 만들다

4일째 -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들다

5일째 – 온갖 물고기와 온갖 날짐승들을 만들다

6일째 – 온갖 들짐승과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들다.

7일째 - 휴식     


천지창조 과정을 간단히 축약하면 이렇다. 뭐 이상한 점이 없는가? 발견을 못 했다면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기 바란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고?      


하루 이틀이라는 개념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하느님은 해를 4일째 만들었다. 이상하다. 해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3일이 지났다. 이 3일은 무엇을 기준으로 셈했을까?      


하느님이 이 세상을 ‘천지창조’했다고 믿는 것은 신앙(‘낮은 수준의’라는 단서를 달기로 하고)이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서를 좀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해가 넷째 날 만들어지고, 그래서 앞뒤가 좀 안 맞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런 것들을 신학(역시 ‘낮은 수준의’라는 단서를 달자)이라고 한다면, 앞에서 말한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신학이 신앙을 더 고취시킬까? 아니면 뭐야? 생 구라잖아, 하면서 내팽개치게 만들까?   

   

믿는 사람들은 도대체 뭘 믿는 것일까? 


이야기를 더 진전시켜보자. 가톨릭 신자들은 주일마다 성당에 나가 미사에 참여한다. 핵심적인 종교 행위의 하나다. 미사 시간에 신자들은 신앙고백을 한다. 자신이 가톨릭 신자로서 무엇을 ‘믿고 있는지’ 고백하는 시간이다. 이것이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이란 예수의 열두 사도들이 했던 신앙고백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어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그것을 빌어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한다.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다음과 같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 성령을 믿으며 / 거룩하고 보편 된 교회와 /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 아멘“     


하나하나 뜯어 살펴보자. 도대체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1.하늘과 땅을 창조한 하느님을 믿는다.

2.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믿는다

3.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났음을 믿는다.

4.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은 것을 믿는다. 

5.예수님이 저승에 갔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 난 것을 믿는다.

6.예수님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 하느님 옆에 앉아 있음을 믿는다.

7.예수님이 나중에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러 올 것이라 믿는다.

8.성령을 믿는다(성령을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9.교회가 거룩하고 보편 되다는 것을 믿는다.

10.성인들의 통공을 믿는다(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정도로 알아들으면 되겠다)

11.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심을 믿는다

12.육체의 부활을 믿는다

13.영원히 산다고 믿는다.   

   

가톨릭 신자들을 두고 ‘믿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때 이 13가지를 믿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물론 성당에 다니다 보면 이 말고도 믿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다만 가톨릭 교회가 뽑아준 핵심이니만큼 적어도 이 13가지는 믿어야 신자라고 할 수 있다.      


신학교에서 이른바 신학을 공부한다고 할 때 신학이란 이 13가지를 좀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을 갖도록 하는 공부라 할 수 있다.    

  

신자들이 13가지를 잘 믿듯이 나 역시 잘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녔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거나(삼위일체론), 진짜 그랬을까(동정녀 잉태설과 부활 사건) 하는 것들이 있었지만 믿었다. 종교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답을 쓰야지 왜 너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거니?


신학교에 들어가서 좀 달라졌다. 믿기만 해서는 도대체 답안지를 채울 수가 없었다. 백지로 내면 반항하는 것 같아 뭐라도 주절주절 써 놓으면 ‘왜 답을 안 쓰고 신앙고백을 써 놨냐’며 타박을 주었다. 답안지에 뭐라도 쓰려면 믿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의심을 해야 했다. 의심부터 했다가 믿을 수밖에 없는 근거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과정, 그것이 신학교 공부였다. 그 근거를 잘 찾아 논리적으로 잘 풀어 답안지에 쓰면 좋은 점수를 받았다.      



일반 대학의 시험 답안지가 소설이나 교수님에게 드리는 읍소형의 개인 서간문이 될 때가 있는 것처럼 신학교에서는 개인의 신앙 고백문이 될 때가 있었다. 



신학교에서 성적, 아주 중요했다. 교수 신부님들은 공부 잘하는 신학생들을 대 놓고 편애했다. 공부 못하는 신학생들,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신학생들의 영성? 품성? 인성? 아주 중요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항목이다. 답안지가 보여주는 정직함에 비하면.   

   

사정이 그러했으니 우선 성적을 잘 받아야 했다. 신학교에서 살아남아 무사히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자연히 의심을 많이 해야 했다. 그래서 좀 많이 했다.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것도 의심했다. 의심하다 보니 의심 거리가 점점 많아졌다. 이러다가 신학교 생활 제대로 하겠나, 걱정이 들 정도로.      


의심은 다양한 방향에서 시작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 군데로 모였다.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이었다.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인가? 이 문제만 제대로 정립하면 사실 다른 것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정체성에서 13가지 믿음 엑기스가 뽑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정체성, 이거 명쾌하게 알아듣기 참 쉽지 않았다.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님이 처음부터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신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자 동시에 완전한 신이 된 것은 예수님이 죽고 300년도 더 뒤에 ‘정해진’ 것이다. 그것도 임시 봉합으로. 뭐라고? 대체 그게 뭔 말 이래? 자기,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는 거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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