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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신앙의 상관관계2

신앙은 성숙해지고 신심은 약해지다

by 우연의 음악 Oct 12. 2021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를 먼저 알아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다. 성서에는 예수님과 성부 아버지와 성령의 관계가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마태복음 28장 19절:공동번역 신약성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Ⅱ고린 13장 13절:공동번역 신약성서)." 성서에 나와 있는 것은 이 정도다.  

    

자연히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는 이들 세 존재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아주 심했다. 갑론을박의 단초가 된 것은 당연히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이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잘 알겠는데, 예수님의 본질적인 정체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생각이 달랐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한 훌륭한 예언자 정도로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로, 하느님과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신이라 생각했다.      


아리우스 논쟁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인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과 신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물론 주류는 하느님과 동등한 신격체로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공식적으로 교회 내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제가 등장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예수가 신인지 인간인지 하는 문제는 정답이 없을 정도로 저마다 생각이 달랐다.



아리우스는 예수는 성부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비슷하긴 하지만 참 하느님은 아니고, 성부에 종속된 존재라 주장했다. 교회의 주류 세력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소집된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아리우스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교회에서 내쫓았다. 이 공의회에서 큰 활약을 했던 사람이 삼위일체론의 근간을 정립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아타나시우스였다(공의회에 참석했을 때 그는 부제 신분이었다).     


겉으로는 아타나시우스의 승리로 보였다. 하지만 아리우스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보호 아래 여전히 그 세력을 유지했다. 콘스탄티누스 2세 때는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영향력을 미칠 만큼 세력이 커지기도 했다. 그만큼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예수님이 신인지 인간인지 하는 문제는 정답이 없을 정도로 저마다 생각이 달랐다.     


2라운드에 올라선 네스토리우스 


아리우스파 세력이 약해질 즈음, 예수님의 정체성을 문제 삼은 또 다른 사람이 등장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1차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교통정리가 끝났는데도 100년 뒤 예수님의 정체성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이다.   

  

428년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자 동시에 완전한 신이라는 교회의 생각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인간인 예수님의 몸에 신이 임했다는 주장을 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은 인간이었는데 일종의 신내림을 통해 신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예수와 신이신 예수가 따로 존재한다고 했다. 이 공방이 너무나 격렬해 교회가 쪼개질 위험에 처하자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소집된다. 이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 주교는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하고 만다.      


그렇게 정리가 되는 듯했지만 끝이 아니었다. 네스토리우스는 페트라(요르단 지역)로 망명했다가 나중에 이집트에서 죽는다. 하지만 그를 추종하던 세력은 ‘네스토리우스교’라는 독자적인 교회를 만들어 페르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나중에는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당나라(618년 – 907년) 수도 장안까지 퍼졌다. 당나라 말기로 접어들면서 네스토리우스교는 쇠퇴하지만 실크로드를 따라 네스토리우스교 선교사들의 이동이 활발했던 중앙아시아 내몽골에서는 오히려 위세를 떨쳤다. 몽골 유목민들 사이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 것이다.      



네스토리우스교는 <경교>란 이름으로 중국에 전파된 뒤 몽골제국의 부흥을 통해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수많은 네스토리우스 교회가 생기고 중국인 사제들도 생겨났다.  



13세기 초 칭기즈칸의 등장으로 광대한 몽골제국이 형성되자 네스토리우스교는 다시 한번 중흥기를 맞이한다. 몽골제국을 따라 중국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때 중국 전역에 수많은 네스토리우스 교회가 생겨났다. 중국인 사제들도 많이 생겨났다. 이 시기에 등장한 중국인 사제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람이 랍반 사우마다. 


중국인 사제의 교황 알현

     

1220년 북경에서 태어난 랍반 사우마는 25살에 네스토리우스교 사제가 된다. 그는 1280년 무렵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위해 대도(지금의 베이징)를 떠나 유럽으로 향한다. 도중에 페르시아에서 몇 년 머물다가 1287년 다시 여행을 계속해 이탈리아 로마에서 니콜라우스 4세 교황을 만나고, 프랑스로 들어가 리옹과 파리까지 여행했다. 그는 유럽 여행을 하고 기록을 남긴 최초의 동양인이었다. 

     

랍반 사우마에게 유럽 여행은 네스토리우스 교회 사제로서 예루살렘 성지 순례가 목적이었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임무도 있었다. 칭기즈칸이 죽은 뒤 몽골제국은 네 개의 칸 국으로 분할되는데, 유럽 세계와 맞닿아 있던 페르시아 지역을 통치하던 제국이 일 칸 국이다. 랍반 사우마는 당시 일 칸 국의 칸이었던 오르곤의 사절로 니콜라우스 4세 교황을 비롯해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왕들을 만나러 갔던 것이다.  

    

오르곤이 랍반 사우마를 사절로 보낸 이유는 분명하다.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이웃한 맘루크 술탄국(사우디아라비아 서쪽과 이집트 동쪽을 차지고 하고 있던 이슬람 왕국)을 쳐부수기 위해서였다. 오르곤이 그런 막중한 임무를 랍반 사우마에게 맡긴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인 네스토리우스교) 사제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같은 그리스도교 세력끼리 힘을 합쳐 이슬람 세력을 물리 치자’는 메시지(십자군을 일으켜 달라는)를 로마 교황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를 사절로 보낸 것이다.  


몽골제국과 유럽 사이에 끼여 있던 맘루트 술탄국은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와 몽골 제국의 눈엣가시였다.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에게는 동쪽으로 진출하는데 방해가 되었고, 몽골 제국에게는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랍반 사우마의 여행경로. 출발지인 대도는 지금의 베이징이다. 문헌에 따라 여행 연도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여행 루트만 참고하면 좋겠다.


교황 니콜라우스 4세는 아르곤이 요청한 십자군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랍반 사우마 일행을 같은 교회의 일원처럼 극진히 대우했다. 교황은 랍반 사우마를 통해 일 칸 국의 네스토리우스교 총대주교에게 동방에 대한 로마 교황의 모든 권한을 부여하는 임명장을 주기까지 했다. 교황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몽골제국을 넓은 의미에서 그들과 같은 종교를 믿는(파는 다르지만) 그리스도교 세력으로 보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는 몽골제국 내에 네스토리우스교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네스토리우스교 분포도. 중국 대륙은 물론이고 인도와 지금의 태국까지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예수님의 정체성을 놓고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정통 교리와 다른 주장을 하던 세력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오랫동안 그 세력을 유지했다.     

 

우리가 가톨릭 신자로서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여러 시대와 여러 신학자들을 거치는 과정에서 조금씩 다듬어지고 손질되었다. 한마디로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신이라고 하기로 하자고 정한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예수님의 정체성을 놓고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가 싸우다가 아리우스파가 이겼더라면, 또 네스토리우스교가 그 세력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그리하여 오늘날 당나라 불교가 신라를 통해 한반도에 전래된 것처럼 네스토리우스교가 ‘경교’란 이름으로 한반도에 들어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더라면(1956년 불국사에서 돌 십자가와 구리 십자가, 마리아상이 발견되었다. 7세기경 당나라에서 신라로 전해진 경교의 흔적으로 짐작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예수님을 믿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승리한 자들의 이론


다시 사도신경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믿어야 할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누가 정리한 것일까? 열두 사도들이? 참고로 주기도문과 달리 사도신경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사도신경은 원래 초대교회(2세기 경)에서 세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교회는 새 신자가 오면 사도신경을 외게 해 그들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했다. 세례의 조건이었던 셈이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첨삭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도신경이란 이름으로 부르면서 사도들로부터 비롯했다는 설화가 덧보태진 것은 4세기 때다. 지금과 비슷한 내용으로 굳어져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신자들의 신앙 고백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때다. 예수님이 죽은 지 거의 1,200년이 지난 시점이다.    

 

사도신경은 성서에도 나와 있지 않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도 아니다. 열두 사도들과 직접적인 연관도 없다. 그렇다면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가 믿는 핵심적인 13가지가 들어 있는 사도신경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모르긴 해도 성서와, 신학자들의 토론 결과와, 세력다툼에서 승리한 사람들의 큰 목소리와, 교회 내에서 구전되던 이야기들과, 여기에다 주변 문화권에서 통용되고 있던 설화나 신화를 참고해 정교하게 정리된 것이 아닐까?    

  

이런 고민과 의심의 출발이 된 것이 적어도 내게는 신학이다. 물론 이것이 신학의 전부는 아니다. 다만 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자연히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게 되는 영역인 것은 분명하다. 내가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졌겠는가?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해보자.      


‘나는 신학을 공부하고 신앙이 더 깊어졌는가?’     


글쎄, 신학을 공부하고 달라진 것은 많다. 적어도 하느님을 ‘흰 수염을 기르고 인자한 얼굴을 한, 예수님보다 나이가 더 많이 들어 보이는 그런 분’이라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잘생긴 서양 영화배우를 떠올리지도 않게 되었다. 천국이 저 하늘 높은 곳에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온갖 좋은 것들을 다 갖다 붙여 만든 상상 속의 천국에 하느님과 예수님이 사이좋게 앉아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다. 하느님이 착한 일을 하면 상을 주고, 나쁜 짓을 하면 유황불이 타오르는 지옥에 처넣는, 그런 옹졸하고 치졸한, 이웃집 아저씨만도 못한 그런 존재라고는 적어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긴 해도, ‘신학을 공부해 내 신앙이 더 깊어졌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은 없다. 윤리를 전공했다고 더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자신할 수 없는 것처럼, 도덕 교사라고 더 도덕적임을 자신할 수 없는 것처럼.      


다만 아주 조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기긴 했다. 신학을 공부함으로써 내 신앙이 더 깊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앙이 조금 ‘성숙’해졌다고는 생각한다. 신앙이 깊어진 것과 성숙해진 것이 얼핏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더 명확해 질려나?      


‘나는 신학을 공부함으로써 신앙이 조금 성숙해지기는 했지만 신심은 오히려 많이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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