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그리고 공장 노동과 인도 여행
엊그제 입대한 것 같은데 금세 제대했다. 다행히 신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을 제법 잘 유지한 체 군대 생활을 마무리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안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군대 이야기를 하려면 거의 팔만대장경 수준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패스.
화사한 5월에 제대했다. 다음 해 3월 복학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무엇을 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기에는 남은 날짜가 너무 길었다. 본당 신부님에게 이야기했더니 찬찬히 생각해보자고 했다. 교구청에서도 별 말이 없었다.
‘공장에 가서 일을 해보자’
기특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제대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일을 시작했다. ‘골든 새시’라는, 여느 집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흰색 창틀 만드는 공장이었다. 월급은 한 달 60만 원. 아침마다 봉고차가 데리러 왔다.
막 제대해 원기 왕성한 상태였는데도 힘들었다. 창틀은 크고 무거웠다. 기술보다는 힘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군대 삽질과 민간인 공장의 강도 높은 노동은 차원이 달랐다. 한 달 만에 야반도주하듯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꽁꽁 숨어 있었다. 창피했던 모양이다.
며칠 지나자 창피함은 심한 자책감으로 격상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데 그것 하나 못 하다니. 평생 하라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몇 달인데 그걸 못해? 이런 등신 같으니라고. 나도 모르게 라틴어 신부님이 하던 인신공격형 질책을 내게 해 대고 있었다.
힘들었지만 보람도 되었다, 돈을 모았으니까
다시 일자리를 찾았다. 월급이 적어 그렇지 일자리는 많았다. 이번에는 자동차 부품 생산 공장이었다. 초보자도 환영이었다. 출근하면 반장이란 사람이 어떤 기계 앞으로 데려가 간단히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대로 따라 하면 되었다. 기계는 그날그날 달라졌다. 대개 떡가래 굵기의 짧은 쇳덩이를 모양에 맞춰 깎거나, 그런 쇳덩이에 구멍을 뚫거나, 몇 조각으로 자르거나 하는 일이었다. 대단한 기술을 요하는 것은 아니었다. 깎는 것은 기계가 했으니 노동 강도도 세지 않았다. 할만했다. 9시부터 6시까지 일하면 한 달에 60만 원 준다고 했다.
6시에 퇴근한 적은 몇 번 없었다. 공장에서는 잔업이라 해서 최소한 7시 30분까지는 일을 해주기 바랐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렇게 했다. 잔업을 하는 날에는 6시에 빵을 하나 주었다. 우유도 없이. 그 빵을 먹고 7시 30분까지 힘을 내어 쇳덩이를 깎고, 구멍 내고, 잘랐다. 야근하는 사람들은 식당에서 맛있는 밥을 주었다. 야근은 9시까지였다. 야근도 많이 했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옷을 벗으면 하얀 런닝이 식용유에 담갔다가 꺼낸 것처럼 노랬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야간 근무였다. 1주일은 야간, 1주일은 주간으로 돌아갔다. 야간 근무는 저녁 9시부터 시작해 다음날 6시에 끝났다. 모두가 잠든 밤에 낯선 기계 앞에 앉아 우유 같은 절삭유를 온몸으로 맞아가며 쇳덩이를 깎고 있으면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낮에 일하는 것과 달랐다.
잠을 자지 않고 일을 하다 보니 육체적 고통도 심했지만 외로움이 더 컸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어두컴컴한 공장의 높은 천장이 괴물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나를 덮쳐 잡아먹을 것 같았다. 놀란 마음에 몇 미터 떨어진 다른 기계를 쳐다보면 천장 귀신의 화신 같은 사람이 유령처럼 앉아 뭔가를 깎고 있었다.
새벽 2시쯤 되면 야간반 반장이 와서 잠시 눈을 붙이라고 했다. 군대 내무반 같은 곳에서 한 시간 정도 쪽잠을 잤다. 옷은 물론 신발도 벗지 않고 웅크린 채. 그렇게 일해 한 달에 80만 원쯤 받았다. 잔업과 야간근무 덕분이었다.
찬바람이 돌기 시작하는 11월에 그만두었다. 4개월 일한 덕에 내 통장에는 200만 원쯤 되는 돈이 쌓였다. 육개장 한 그릇에 1,500원 하던 시절이니 무척 큰돈이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척했지만 사실 나는 다 계획이 있었다.
해외여행을 떠난 최초의 신학생
내가 계획한 것은 배낭여행이었다.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해외여행 자유화가 실시되었다. 이제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외국 여행을 갈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여행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동남아시아와 유럽 패키지여행 상품이 쏟아져 나왔다. 어르신들은 떼를 지어 그런 여행을 떠났다. 대학생들은 배낭을 메고 여행을 떠났다. 바야흐로 대한민국도 해외여행 시대에 돌입했다.
본당 신부님에게 계획을 말씀드렸다. “그래, 집에 있으면 뭐하겠니. 알아서 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 신부님에게 말씀드렸다. 대환영이었다. ‘경비가 모자라면 내가 보태주마’ 이런 분위기였다.
고무된 마음으로 교구청으로 달려갔다. 신학생 지도를 책임진 성소국장 신부님에게 말씀드렸다. 단칼에 안 된다고 했다. 신학생이 해외여행을 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4개 신학교를 통틀어). 게다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3개월 씩이나 가겠다고 했으니. 그것도 혼자서. 나는 12월에 떠나 2월에 돌아 올 생각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깊었다. 성소국장 신부님이 가지 말라고 하면 갈 수 없었다. 성소국장 신부님은 주교님의 위임을 받아 교구 신학생들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신부님이었다.
구구절절이 쓴 편지를 보냈다. 내가 왜 배낭여행을 가려고 하는지. 거기에는 쇳가루 마셔가며 번 돈으로 가는 것이라는 내용도 빠트리지 않았다. 물론 신부님은 내가 공장에서 일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쳐가며 가는 여행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뒤 성소 국장 신부님이 교구청으로 불렀다. 갔다 오라고 허락을 했다(나중에 신부님은 여행 경비에 보태라며 10만 원을 주시기까지 했다). 그 이유가 재미있었다. 내가 인도로 가겠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부님은 내가 외국 여행을 가게다고 하니 유럽 여행을 가려고 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도는 그저 가난하고 더러운 나라였다) 인도에 간다는 것을 알고는 일반 대학생들처럼 놀고 즐기고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뭔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인도의 가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다만 물가가 싸서 여행하기는 좋겠다는 정도였다. 깨달음은 전혀 관심 없었다. 생각도 안 해 봤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갠지스 문명과 인더스 문명을 일으킨 나라로서의 인도가 궁금했다. 그 이야기는 신부님에게 하지 않았다. 신부님은 나의 인도 여행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4개 신학교 신학생 가운데 해외 배낭여행을, 그것도 혼자서, 3개월 일정으로 떠난 최초의 신학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