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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사제수업 14화

신(神) 존재 증명1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神이다

by 우연의 음악

복학하자 본격적인 신학 공부가 시작되었다. ‘신론’이나 ‘그리스도론’을 공부한 것이 이때다. 신학생이면 당연히 배우고 고민해야 할 과목들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런 과목을 공부하면서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신앙’ 또는 ‘신심’이 상당 부분 퇴행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내가 믿었던 ‘그분’이 도대체 누구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신학의 부작용? 모르는 게 약이었는데 알아서 병이 된, 뭐 그런?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화는 기본적으로 움직임에 의해 벌어지는 현상이다. 움직임, 학문적 용어로 말하면 ‘운동’이다. 운동은 스스로 일어나지 않는다. 운동을 일으키는 요인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무엇을 밀었을 때 운동이 일어난다. 손가락은 어떻게 운동을 일으켜 무엇인가를 밀 수 있었을까? 몸 안의 근육이 움직여 손가락을 움직이게 했다고 하자, 그 근육을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일까? 뇌의 명령으로 근육이 움직였다면, 뇌를 움직인 것은 또 무엇일까?


움직임의 원인을 찾아 끊임없이 생각의 골짜기를 올라가다 보면 맨 마지막에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존재가 요구된다. 그래야만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자, 곧 ‘부동(不動)의 동자(動者)’, 이것을 신(神)이라고 했다. 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먼저 했고,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 신학자로 존경받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또 했다. 그는 ‘운동을 통한 신 존재 증명’이란 이름으로 이를 체계화했다. 그 유명한 <신학대전>이란 책을 통해.


곰곰이 읽어보면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장난 같기도 하다. 다만 최초의 운동을 일으키는 ‘부동의 동자’가 등장하지 않으면 이 세계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부동의 동자를 인정하면 이 세계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생성, 유지, 발전, 소멸해 가는 것이 쉽게 설명되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만약 그렇다면 ‘부동의 동자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말해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 발전, 소멸시키는 주체라면 도대체 그 신은 누가 만들었을까?




KakaoTalk_20220420_103309506.jpg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 신은 누가 만들었을까? 신이니까 스스로 절로 생겼을까?



‘누구긴 누구겠어? 자기 자신이지. 신이잖아 신, 말 그대로 신이기 때문에 스스로 생겨난 거야. 누가 만든 게 아니라니까 이 등신아!’


아,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아멘’ 해 버렸으면 얼마나 간단하고 좋았을까? 그게 잘되지 않았다. 복학하기 전 쇳가루 마셔 가며 번 돈으로 인도를 여행했다고 했다. 만약 내가 인도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신 문제로 머리를 감싸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아멘’하고 스톱했을까? 어차피 공부한다고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끝에 가서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니까. 인도가 발목을 잡았다. '혹시 우회로를 통해 좀 더 가까이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붓다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인도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부드가야라는 동네에 가보았다. 우리나라 면 소재지만 한 작은 동네였다. 동네 한가운데 30미터는 족히 될만한 거대한 불탑이 있었다. 그 안에는 석굴암 비슷한 공간이 있었고, 붓다 상이 놓여 있었다. 불탑 뒤에는 큰 보리수나무가 있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 밑에 앉아 있었다는 그 보리수나무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쯤 되는 나무라고 했다.


부드가야에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보리수나무 주위를 돌았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돌았다. 불교 사람들은 뱅뱅 도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들은 염주를 굴리며 돌았고 나는 생각을 굴리며 돌았다.


‘도대체 붓다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어느 날 불탑 입구에 대형 관광버스가 한 대가 섰다. 문이 열리고 먹물 옷을 입은 한국 보살님들이 우르르 내렸다. 스님도 몇 분 있었다. 그들은 불탑 안으로 들어가 붓다 상에 예의를 표하고 보리수나무 밑에서 기도를 했다. 그런 다음 통과 의례처럼 보리수나무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나도 그들 꽁무니에 따라붙어 같이 걸었다. 의도적으로 한 스님에게 접근했다. 50대쯤으로 보이는 스님은 학식이 풍부해 보였다. 멀리 인도에서 만난 자국민으로서의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스님에게 물어보았다.


“스님, 도대체 붓다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아세요?”


스님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 질문을 도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당신, 붓다가 뭘 깨달았는지 알아? 나는 잘 아는데’ 그렇게 들린 모양이었다. 나는 그럴 의도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질문을 좀 말랑말랑하게 수정했다.


“스님, 고타마 싯다르타는 어떻게 해서 깨달은 사람 붓다가 되셨나요?”


그제야 내 질문이 뭔가 궁금해하는 자의 예의 바른 태도로 비쳤나 보았다. 스님은 희번덕거리는 눈빛을 거두어들였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표정은 여전히 ‘뭘 그런 걸 묻고 다니냐’는 듯했다.


“인생이 허무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집착을 버리세요.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궁금해하는 것도 집착입니다. 모든 불행은 바로 그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자세히 이야기해봤자 내가 못 알아들을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성당에 다니는 80살 할머니도 할 수 있는 말을 해 놓고 스님은 ‘내 말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하는 표정을 지으며 보살님들 쪽으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불교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붓다가 겨우 그거 깨닫자고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보리수나무 밑에서 7년 동안이나 도를 닦았을 것 같지 않았다.



KakaoTalk_20220420_103247147.jpg



여행 일정을 급 변경했다. 부드가야에 죽치고 앉아 스님들을 기다렸다. 사흘이 멀다 하고 관광버스가 한국의 보살님들과 스님들을 실어 날랐다. 스님이 보이기만 하면 쫓아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은근슬쩍 물었다. 스님들은 지나가는 말로 툭툭 던졌다. 효과가 괜찮았다. 작정하고 하는 말보다 그렇게 툭툭 던지는 말에 오히려 건질 게 있었다. 10일쯤 그 짓(?)을 하자 붓다가 뭘 깨달았는지 조금 알 듯했다. 그래도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어느 날 또 버스가 한 대가 왔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큰 절의 주지 스님이었던 스님이 인솔해서 온 성지 순례단이었다. 스님 덩치가 산 만했다. 눈도 부리부리한 것이 돈스파이크처럼 생긴 스님이었다. 먹물 옷을 벗고 '츄리닝'에 ‘쓰레빠’만 신어도 조폭 중간 보스 자리는 가뿐히 차지할 것 같았다. 인상이 그렇다 보니 스님이 무슨 말을 해도 긴가민가 한 것이 영 미덥지 않았다.


그래도 스님인지라 뭐라도 하나 건지려고 교묘하게 이런저런 질문을 날렸다. 스님은 도대체 문장형 언어를 구사하는 데 장애가 있는지 내 질문에 뭐든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다섯 음절을 넘어가는 말이 거의 없었다. 좋게 해석하자면 언어를 아주 경제적으로 구사하는 분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맞아, 그거군’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신기한 스님이었다. 어째 좀 ‘구워삶으면(?)’ 얻어걸리는 것이 많을 것 같아 바짝 붙어 앉아 치근덕거렸다. 너무 치근덕거렸나? 스님이 경계를 했다.


“이봐, 거사님, 나 여자 좋아해요.”

하더니 껄껄 웃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저녁에 아쇼카로 와요. 고스톱이나 한판 치게.”


고스톱? 깊은 산사에서 런닝 차림에 담배를 꼬나물고 도박판을 벌이고 있던 스님들 모습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뉴스 화면이었다. ‘괜히 가서 스님하고 고스톱 치다가 도매금으로 붙잡혀 가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음, 좀 깊은 이야기를 해 주겠다, 그 말씀이렷다’ 아쇼카는 부드가야에 있는 고급 호텔 이름이었다.


그날 밤 대구에서 온 어떤 아저씨와 같이 갔다. 그 아저씨는 여행 중 지갑을 잃어버려 돈을 전달받을 때까지 오도 가도 못 하고 부드가야에 붙잡혀 있던 중이었다. 사실 스님들보다 그 아저씨에게 불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아저씨는 전직이 화려한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식당을 하고 있었는데, 그전에는 술집도 하고, 그전에는 조폭 똘마니 노릇도 하고, 그전에는 타짜 노릇도 하는 등 사연이 많았다.


어둠의 세계에서 화려하게 살던 그 아저씨는 이혼을 당한 뒤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갔다고 한다. 어느 작은 절에서 두 명의 도반과 함께 행자 생활을 하던 중 도반 두 명이 술을 마시고 싸우는 바람에 셋이 한꺼번에 쫓겨났다고 했다.


“아니 까짓 싸움 좀 한 것 같고 쫓아내요?”

“좀 심하게 했지.”

“얼마나요?”

“한 사람이 도끼로 절간 문이란 문은 다 때려 부숴 버렸거든. 주지 스님한테 욕도 막 하고...”

쫓겨나는 것으로 끝내준 게 순전히 그 절의 주지 스님이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타짜 스님의 출현


돈스파이크 스님이 젊은 스님 한 사람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음, 오늘의 대화를 위해 공부깨나 한 스님을 부른 모양이군. 출발이 좋아’그런 생각을 하며 싱긋 웃었다. 그런데 젊은 스님은 우리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판을 깔더니 ‘그럼, 시작해 볼까요’ 했다.


‘뭐야, 고스톱이 진짜 그 고스톱이었어?’


말도 안 돼, 하면서도 패를 쥐자마자 본능적으로 광이 몇 개 들었는지부터 살폈다. 참고로 나는 고스톱을 정말 못 쳤다. 남이 뭘 내는지 도통 관심 없었다. 오직 내 것 먹기만 바빴다. 돈스파이크 스님도 나와 실력이 비슷한 것 같았다. 젊은 스님은 화투장 좀 잡아 본 솜씨였다.


판이 돌자 젊은 스님이 돈을 다 땄다. 나와 돈스파이크 스님이 계속 잃었다. 대구 타짜도 영 맥을 못 췄다. 그래도 잃지는 않았다. 쇳가루 마셔 가며 번 돈을 멀리 인도까지 와서 축낼 수는 없었다. 그것도 노름판에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웬걸, 그럴수록 더 잃었다. 돈은 계속 젊은 스님 앞에 쌓였다. 대구 타짜도 돈을 못 따 그런지 점점 얼굴이 일그러졌다. 급기야 ‘어이쿠, 난 도저히 못 하겠네’ 하면서 화투장을 내려놓았다. 타짜라더니 순 구라였다(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자꾸 엉뚱한 것을 내 놓아 같이 칠수가 없었다고 했다).


대구 타짜가 빠지자 광 팔 사람이 없어 화투판이 영 재미가 없었다. 결국 두어 판 더 돌리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나와 돈스파이크 스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젊은 스님 앞에 수북이 쌓였다. 돈스파이크 스님이 젊은 스님을 보며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허허 스님, 염불은 안 하고 화투장만 잡았나, 그 새 실력이 일취, 허허!”


젊은 스님이 화투판을 접어들더니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커다란 보온 통을 들고 돌아왔다. 돈스파이크 스님은 어느새 차 마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아, 나는 이 방 안에서 뭐라도 건지고 나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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