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세계를 향해 내디딘 운명적인 발걸음
“여러분 선배 중에 중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4학년 때다. 어느 날 윤리신학 강의 중에 교수 신부님이 한 말이다. 그 교수 신부님은 광주 신학교에 있다가 대구 신학교가 생기면서 옮겨 온 분이었다. 신부님이 말한 중이 된 어느 신학생의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광주 신학교에 다니던 한 신학생이 여름방학 때 순천 송광사에 간 모양이다. 신학생들이 절에 가는 것은 예사로 있는 일이었다. 땅밟기를 한다거나 대웅전에 불을 지르기 위해 가는 것은 아니고, 그냥 놀러 삼아 갈 때가 대부분이다. 송광사에 간 그 신학생이 절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구경을 하고 있는데, 웬 스님이 지나가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 자네는 중이 될 상이긴 한데, 어째 서양 중이 되려고 하는가?”
그 말에 신학생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스님이 내가 신학생인 걸 어찌 알고 서양 중 운운하는 것일까?’
그 신통한 말을 한 사람은 구산 스님이었다. 구산 스님은 당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대선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83년 가부좌를 한 채 입적했을 정도로 ‘선禪’의 대가이기도 했다. 송광사 마당에서 있었던 그 짧은 대화가 계기가 되어 그 신학생은 구산 스님과 인연을 이어 갔다. 그러다가 스님의 꼬임(?)에 빠져 신학교를 나가 머리를 깎고 말았다.
이것이 교수 신부님이 한 이야기의 전말이다. 마지막으로 신부님은 “지금 그 스님이 인도 다름살라에 있대요.”하고 이야기를 끝냈다.
인도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인도를 여행하긴 했지만 다름살라에는 가보지 못했다. 듣기는 많이 들었다. 인도 북부에 있는 작은 고산도시였다. 티베트 망명 정부가 있고, 그 유명한 달라이라마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언젠가 그 스님을 한 번 만나 보리라 생각했다. 물론 막연한 생각이었다.
다시 인도로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이듬해 다시 인도에 갔다. 인도에 들어가자마자 신학생 출신의 그 스님을 수소문했다. 인도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많지 않을 때라 금방 소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스님은 진짜 다름살라에 있었다. 법명도 알아냈다. 다름살라에 머물며 티베트 불교를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달라이라마의 한국어 통역을 담당할 정도로 달라이라마와 가깝다고 했다.
당시 달라이라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쌍벽을 이룰 만큼 세계적으로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었다. 각국 정상들은 앞다투어 달라이라마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전 세계의 뉴스거리였다. 그의 움직임이 뉴스가 된 것은 가는 곳마다 중국의 티베트 침략에 대한 부당성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달라이라마는 중국의 티베트 침략에 평화적으로 맞선 공로로 198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 후 일약 평화의 아이콘이 되어 전 세계인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그런 달라이라마를 가까이서 보좌하고 있는 스님이 광주 신학교 출신의 그 스님이라고 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달라이라마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달라이라마가 주도하는 법회에 참석하면 바로 눈앞에서 법문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여행자도 신청만 하면 법회에 참석할 수 있다고 했다. 법당이 크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들도 대규모가 아니라 법회가 끝나면 간단한 질문과 답변 시간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그 자리에 한국인들을 위한 통역자로 그 스님이 참석한다고 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인연이 되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결과론적이지만 그 기회는 실제로 나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운명은 나를 다름살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속으로 밀어 넣었다.
다름살라로 향하다
그날의 기억이 어제처럼 선명하다. 더운 인도에서도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당시 나는 산티니케탄이란 곳에 있었다. 켈커타에서 완행 기차로 4시간 정도 가면 나오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곳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타고르 대학’으로 알려진 ‘비스바 바라티’ 대학이 있었다. 그 대학에 한국 유학생들이 10명쯤 있었다. 나는 그 유학생들과 어울려 재미나게 놀고 있던 중이었다.
그날, 서쪽 하늘이 유난히 빨갛게 물이 들었다. 인도에서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나는 귀신에 홀린 듯 짐을 챙겨 역으로 달려갔다. 순간적인 판단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리고 무작정 북쪽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최종 목적지는 다름살라였다.
산티니케탄에서 다름살라까지는 2,300킬로미터가 넘었다. 강원도 고성 동해안 최북단에서 대각선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 해남 땅끝마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곳의 거리는 600킬로미터쯤 된다. 2,300킬로미터는 부산에서 중국 하얼빈보다 더 먼 거리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간 개념으로는 쉽게 가늠이 안 되는 거리다. 당시 인도의 교통 사정을 감안하면 며칠이 걸릴지 확신할 수 없는 거리이기도 했다.
좌석 예매도 안 하고 올라탄 기차였다. 무뚝뚝한 차장은 대단히 권위적인 얼굴로 입석 사람들이나 타는 맨 뒤 칸으로 가라고 했다. 인도 기차는 칸과 칸이 막혀 있다. 맨 뒤 칸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으로 걸어가야 했다. 30량이나 되는 긴 기차에서 입석 칸은 맨 뒤에 달랑 한 량 달려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딱딱한 나무 의자가 놓여있는 실내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했다. 침대 칸을 살 수 없는 가난한 인도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천장에서 작은 선풍기가 쉴 새 없이 뜨거운 바람을 내뿜고 있었다. 그 열기와 냄새, '포로수용소가 이렇겠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외국인이라고 인심 좋은 인도 사람들이 좀 편안하게 설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잠시 뒤, 기차가 덜컹거리며 북쪽을 향해 떠났다. 내 앞에 어떤 운명적인 사건이 벌어질지 나 자신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말 그대로 미지의 세계를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