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유(有)'들을 창조해 내고 거둬들이는 '무(無)'의 정체
‘나는 왜 계속해서 나일까?’
나는 ‘나’로 태어나 ‘나’로 살다가 ‘나’로 죽는다. 단 한 번도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 이론에 궁금증이 든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남을 변하게 하는(움직이게 하는)것'을 신이라고 했다. 내가 ‘나’로 태어나 ‘나’로 살다가 ‘나’로 죽는다면 결국 ‘나’는 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나’가 신인가?
‘나’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내가 잘 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인간인 내 안에 신의 속성이 있단 말일까?
내가 ‘나’로 태어나 ‘나’로 살다가 ‘나’로 죽는 것은 사실인데, 인간인 ‘나’가 변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도 수시 때때로. 어제의 내 모습과 오늘의 내 모습, 같은 것 같지만 같지 않다. 껍데기만 변하는 것도 아니다. 속도 변한다. 껍데기보다 더 화끈하게 변한다.
인간의 육체는 7년을 주기로 완전히 리모델링된다고 한다. 7년 전의 내 몸과 7년 후의 내 몸은 같은 세포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탈바꿈한다. 7년 전의 내가 7년 후의 나라는 증거는 없다. 적어도 내 몸의 세포 수준에서는. 정신은 더 하다. 사실 내가 하는 생각이 진짜 내가 하는 생각이 맞는지 우리 모두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생각의 변화가 너무 무쌍하기 때문이다.
몸속의 모든 세포가 화끈하게 바뀌고, 생긴 모습도 바뀌고, 생각은 너무나 자주, 너무나 변화무쌍하게 변해 원래의 내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 조차 아리송할 정도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해서 ‘나’다. 이 ‘나’를 ‘나’이게 하는 연속성은 어디에 있을까?
부드가야의 젊은 스님
스님은 이 연속성을 ‘아트만(Atman)’이라고 했다. 그 말을 한 스님은 돈스파이크 스님이 아니라 젊은 타짜 스님이었다. 고스톱을 칠 때는 입을 꼭 다물고 남의 패만 읽더니 화투판을 접자 모든 에너지가 입으로 몰렸는지 거침이 없었다.
“아트만은 간단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도 간단히 알아듣자면 ‘자아(自我)’쯤 됩니다. 인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아, 곧 아트만이 있고, 이 아트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이 아트만 때문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내일의 '나' 사이에 동일한 연속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바꿔 놓고 보니 많이 들어 본 말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부동의 동자’였다.
“그럼 아트만이 신인가요?”
내 질문에 타짜 스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신존재 증명에 따르면 신이라 할 수 도 있겠죠.”
스님의 입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란 말이 나오자 신기했다. 스님이라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부하지 말라는 법이 없는데 인간의 선입관이 무서웠다.
“그럼, 개별 인간들에게 아트만이 있다면, 인간이 신인가요?”
“거사님이 신이 아닌 것은 거사님이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우문현답이었다. 스님은 계속 이야기했다.
“나도 잘 모릅니다만, 굳이 인간의 머리로 알아듣는다면 거대한 아트만 덩어리가 있고, 그 아트만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각각의 인간들에게 붕어빵 속 팥 앙금처럼 조금 들어 있는 게 아닐까요?”
스님의 붕어빵 이론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해가 쏙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이 모상을 팥 앙금이라 생각하니 금방 알아들을 것 같았다.
“스님, 제가 궁금한 것은 도대체 붓다가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옆에 앉아 졸고 있던 돈스파이크 스님이 눈을 감은 채 염화미소를 날렸다. 조는 것 같았지만 자지는 않는 것 같았다. 젊은 스님은 ‘음’ 하는 신음소리를 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좀 길게 이야기할 테니 졸지 말고 잘 들으라는 신호 같았다.
“어느 날 바라나시 강변에(인류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한 곳인 갠지스 강변) 한 사내가 나타났습니다. 사내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안 아트만(an-atman)을 외쳤습니다. ’아트만은 없다‘고 했습니다. 강변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트만이 없다니, ‘해는 서쪽에서 뜬다’는 말만큼이나 파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바라나시 강변은 인도 곳곳에서 이른바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신의 깨달은 바를 주장하는 곳이었습니다. 일종의 '깨달음 공개 오디션' 장소였습니다. 인도 전역에서 도 좀 닦았다는 사람들은 모두 바라나시 강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강변에 모여 있는 군중들을 상대로 자신이 깨달은 바를 이야기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깨달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면 ‘깨달은 사람’이 되는, 뭐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 사내란 사람이 붓다입니까?”
스님은 대답 대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트만은 없다’는 사내의 말에 군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자기 동일성은 어디 있는 거요?’ 사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내가 원인이 되어 있는 것이요. 이전의 나는 그 이전의 내가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요. 내가 태어난 것은 죽었기 때문이요. 죽은 것은 병들었기 때문이고, 병이 든 것은 태어났기 때문이요. 내가 '나'인 것은 이전의 '내'가 원인이 된 결과요.’”
잠시 이야기를 멈춘 타짜 스님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스님의 이야기는 궁극적인 동자(動者)를 찾아가던 아퀴나스와 비슷했다. 아퀴나스의 결론은 부동의 동자에 다다랐지만 붓다로 추정되는 그 사내는 그 동자마저 다른 동자의 원인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했다. 스님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사내는, 7년 전의 갑돌이가 7년 후에도 갑돌이로 남아 있는 것은 7년 전의 갑돌이가 원인이 되어 7년 후의 갑돌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갑돌이가 원인이 되어 7년 후의 갑돌이가 또 있겠지요.“
”그런 식으로 하면 결국 최초의 원인이 요청되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 요청에 수직적 사고방식으로 답한 것이 서양철학과 신학이죠. 수직적으로 생각하면 제1원인이 요청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1원인, 그것을 신으로 보는 것이 그리스도교 아닌가요?”
나도 모르게 뜨끔 했다. 스님은 내가 신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그렇게 물었다. 나는 그때까지 내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었다.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스님은 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붓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1원인도 다른 것의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존재의 수레바퀴입니다.”
스님은 ’사내‘를 붓다로 바꿔 부르고 있었다. 내가 물었을 때는 대답도 안 하더니 은근슬쩍 대답한 셈이었다. 특이한 화법이었다.
세상에 없던 생각의 틀을 내놓은 자
그렇구나. 붓다는 전에 없던 ’생각의 틀‘을 이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구나. 인간과 우주,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것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 있어 그때까지 널리 알려져 있던 방법과 정반대 되는 것을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자아(自我)‘라는 천체 망원경만 있던 세상에 ’무아(無我)‘라는, 정반대 방식으로 구동되는 천체 망원경을 내놓았던 셈이다.
내가 생각했던 우회로는 기대 이상으로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이 변화는 필연적으로 소멸을 불러온다. 문제는 그 소멸이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종교인으로서 정서적 판단을 내린다면 천국이나 지옥, 극락, 구원, 아주 수준을 바닥까지 낮춰 버리면 휴거니 예수 천당 불신지옥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은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는 카드니까 제쳐두고, 우선 인간의 머리로만 생각한다면 붓다가 말한 ’무아(無我)'의 확장판인 '무(無)의 세계'가 아닐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 세상에 있던 모든 유(有)들은 변화와 소멸의 단계를 거치면서 무(無)의 세계로 사라져 들어간다. 동시에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무엇인가가 '생성'된다. 그 '유(有)'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것도 없던 것'에서 생겨난다면, 그 유(有)들이 오는 곳은 무(無)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無)의 세계'는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꽉 차'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있던 것'이 다 들어가고, 생성되는 '모든 새로운 것'이 들어 있는 곳이라면.
모든 유(有)들이 무(無)로 사라지고, 무(無)에서 모든 유(有)들이 생성(창조)되어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거친 뒤 소멸의 단계를 밟아 다시 무(無)의 세계로 돌아간다면, 유(有)와 무(無)는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과 결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세계관이 신학생으로서의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한 세계관이 과연 하느님과 예수님 대한 나의 생각을 깊고 넓게 확장시켜 줄 수 있기는 한 것일까? 그날 밤, 고스톱 판 끝에 마련된 그 대화의 자리에서 나는 너무나 큰 숙제 덩어리를 껴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