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와 앞산과 대구 백화점 꼭짓점 댄스
짐작했을지 모르지만 신학교는 아무 때나 밖에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정해진 날에 정해진 시간 동안만 외출할 수 있었다. 세세한 규칙들이 바뀌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모든 신학교가 큰 틀에서 비슷할 것이다.
1학년들은 입학 후 한 달 동안 외출이 없었다. 선배들은 수요일 오후와 일요일 오후에 외출을 나가면서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사다 주께”했다. 한 달 동안 외출이 없었지만 딱히 불편한 것도 없었다. 감옥살이하는 것도 아니었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시켜주고, 게다가 영성 수련을 위해 기도까지 하게 했으니 여러 가지 박자가 잘 맞는 곳이 신학교였다.
그래도 피 끓는 청춘이었다. 3월 중순이 넘어가자 기숙사 화단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기 시작했다. 급기야 여기저기 꽃도 피었다. 봄바람까지 살랑거리자 마음이 급속도로 뒤숭숭했다. 그때만 해도 기숙사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앞산 순환도로에는 차보다 걷는 사람이 더 많았다.
주말과 휴일이면 벚꽃이 막 피기 시작하는 가로수 길을 많은 사람들이 걸었다. 그런 날이면 나도 모르게 그 길을 물끄러미 내려다볼 때가 많았다. 젊은 연인들이 어깨를 비벼대며 걷는 모습을 볼 때면 야릇한 기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난 이 안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햇빛이라도 찬란한 날이면 야릇한 기분은 더욱 야릇해졌다. 그 기분을 문자화한다면 ‘나도 나가고 싶다’쯤 될 것이다. 신학교는 정문이든 후문이든 늘 활짝 열려 있었다. 특히 후문은 기숙사 뒷문으로 나가 100여 미터만 걸어가면 바로 앞산 순환도로였다. 어깨를 비벼대며 걸어가는 풍기문란 형 연인들의 멱살을 잡고 욕을, 아무튼 그런 사람들과 맞닥뜨릴 수 있었다. 그 문을 나서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같았다. 즐겁고 유쾌하고 재미있는 세상이. 물론 신학교 안에서도 재미난 일은 많았다.
.깨진 안경을 쓰고 다니는 신학생들이 많은 이유
.신학생이 남의 손바닥에 오줌 누는 방법
.주교님의 털
뭔가 궁금증이 일어나는 질문들이지 않은가? 이 글을 계속 읽다 보면 절로 답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군대에서도 재미난 일은 많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군대가 서로 가고 싶어 안달하는 곳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마찬가지로 신학교가 재미난 곳은 사실이지만 난 좀 다른 모양의 재미가 그리웠나 보았다.
첫 외출
성질 급한 벚나무가 조금씩 꽃망울을 터트릴 즈음 첫 외출을 나갔다. 대구에 온 지 한 달만이었다. 한 달이 되긴 했지만 밖에 나간 적이 없었으니 어디 가서 재미있게 놀아야 할지 몰랐다. 교구 선배들이 에스코트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여섯 명이 같이 나갔던 것 같다.
신학교 정문 앞이 버스 종점이었다. 시내에서 들어온 버스는 정문 앞에서 돌아 나갔다. 나가기 전에 10분 정도 한쪽 가에 서 있었다. 정문에 늘 버스가 서 있었으니 그 점은 참 좋았다. 버스를 타면 한 번에 대구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백(대구 백화점) 근처까지 갔다. 20분쯤 걸렸다.
첫 외출을 시작으로 매주 수요일 오후마다 외출했다. 점심 먹고 나가 저녁 기도가 시작되는 5시 30분까지 들어와야 했다. 외출 날이 되면 구관은 완벽하게 텅텅 비었다. 도둑놈이 들어와 침대며 책상을 트럭째 실어가도 모를 정도였다. 신관에 사는 고학년 중에는 외출 날에도 안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외출 날만 되면 우리는 무조건 대백으로 갔다. 그 근처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다 있었다. 큰 개봉관을 비롯해 곳곳에 소극장들이 숨어 있었다. 규모가 서울의 종로서적만 했던 제일서적도 있었다. 10분에 100원짜리 당구장도 많았다. 그 유명했던 ‘뮌헨 호프’도 있었다. 거기에다 당시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수많은 음악다방까지. 젊은 청춘이 놀기에 대백 주변은 맞춤형 장소였다. 우리는 대백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영화를 보고, 당구를 치고, 제일 서적에 들렀다가 뮌헨 호프로 가서 남은 시간 동안 생맥주를 마셨다.
2학년이 되면서 일요일 오후에도 외출할 수 있었다. 1주일에 두 번이나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자 즐겁던 외출도 시들해졌다. 무엇이든 못 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자연히 일요일 외출 때는 앞산 등산을 가는 일이 잦아졌다. 교수 신부님들도 은근히 등산을 가기 바랐다.
교수 신부님들의 바람 때문은 아니었지만 많은 신학생들이 외출 때 등산을 갔다. 후문을 나가면 곧바로 앞산 등산로가 나왔다. 풍선 모양으로 한 바퀴 돌고 내려와 앞산 공원 휴게소에서 캔맥주를 한 잔 마시고 들어오면 시간도 귀신같이 맞았다.
하루 외출과 등산
매월 첫째 일요일은 종일 외출 날이었다. 아침 먹고 나갔다가 끝기도 시간인 7시 50분까지 돌아오면 되었다. 시간이 넉넉했기 때문에 신학생들은 멀리 원정 산행을 갔다. 동기나 선후배들끼리 팀을 꾸려서. 그때 자주 갔던 산이 대구 팔공산, 창녕 화왕산, 달성 비슬산, 밀양 천황산, 합천 가야산과 황매산 등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많은 산을 갔다. 물론 대백 근처에서 하루 종일 놀다 오는 날도 있었다.
종일 외출 날은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 자연히 곱게(?) 들어오는 신학생이 거의 없었다. 새색시처럼 얌전한 골수 범생이류 신학생들도 저녁을 먹으면서 마신 술로 얼굴이 발그스름해서 돌아왔다.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은 집단으로 술에 관대한 나라였다. 신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장 신부님을 비롯해 교수 신부님들은 외출 시간을 1분이라도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했다. 그에 비해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맨 정신으로 1분 늦게 들어온 신학생과 인사불성이긴 했지만 제시간에 들어온 신학생이 있었다면 모르긴 해도 1분 늦은 맨 정신의 신학생이 더 혼났을 것이다.
관대하다는 것과 권장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다. 그런데도 이 둘을 헷갈려 한 신학생들은 외출을 나가면 참 많이 마시고 들어왔다. 무엇보다 종일 외출 날이 그랬다. 대부분의 신학생들이 간당간당하게 들어와서는 헐레벌떡 성당으로 들어가 끝 기도에 참석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신학생들이 10분 전까지 술집에 앉아 있다가 빛의 속도로 뛰어 학교로 돌아와 성당에 앉았다고 생각해보라. 성당 안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술을 극도로 죄악시하는 개신교 목사님들이 봤다면 기절초풍할 풍경이었다.
‘무슨 놈의 이런 성직자 양성 기관이 있나?’
‘가톨릭이란 종교가 과연 양식이란 게 있는 종교이기는 한가?’
‘거룩한 성당 안에서 술 냄새를 풍기다니, 그것도 떼로?’
꼬장꼬장했던 학장 신부님도, 무섭디 무서웠던 해병대 출신 라틴어 신부님도 외출 날 밖에서 마시는 술에 대해서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지 않는 한. 다행히 그런 신학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아마 학장 신부님을 비롯해 교수 신부님들도 즐겨 술을 마시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기에다 예수님의 첫 기적이 물로 술을 만든 것이라는 성경 말씀에 충실하자는 생각에 신학생들이 그렇게 마셔댔던 것은 아닐까?